우리 속담에 "고비에 인삼"이란 말이 있다.

전국 산야의 어느곳에서나 자라고 어린잎과 줄기는 나물로, 뿌리는
약용으로 쓰는 흔한 고비의 뿌리에서 인삼이 생겼다는 것인데, 도저히
상상도 할수없는 일이 일어나 난처하게 됐을대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인삼이 이처럼 진귀한 신초로 여겨졌다.

고려인삼은 1,500여년전 중국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양의 도홍경이 쓴 의학서적인 "신농본초경집주"와 "명의별록", 그리고
"양서"에 백제 고려인삼의 품질에 관한 기록과 고구려및 백제가 자주 인삼을
조종한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삼국사기" "향약구급방"에 올라있는 인삼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경주지방에서는 이에 1,200여년전인 신라 소성왕때 자연생
인삼을 재배했고 고려 고종때(1214~1260)는 이미 인삼을 인공적으로 재배
했다고 한다.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모후산일대가 본격적인
재배인 삼의 발상지이며 이 "동복삼"이 개성상인들에 의해 개성에 도입되어
개성이 인삼재배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고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나온 1552년께는 본격적으로 인삼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특히 당나라 숙종때 문헌인 "해약본초"에는 고려인삼은 붉은 실로 묶어
포장했다는 대목이 있어 그때도 외국에 보내는 인삼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한 가공기술이 있었음을 엿볼수 있다.

또 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솥에 쪄서 말린 인삼"이
그대로 말린 인삼보다 약호가 더 좋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도 "홍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최남선은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자연생의 인삼이 많아서 1년에 수만근을
채취해 일본에서 은과 동을 사다가중국에 팔아 이익을 얻고 또 인삼을
주고 중국에서 생사와 주단을 사다가 일본에 팔아 이익을 얻는 국제무역을
함으로써 수백년동안 국제무역의 수지는 거의 인삼이 지탱해 왔다고 설명한
바 있다.

1908~1910년도 인삼은 쌀 콩 소 밀등과 함께 10대수출품목의 하나였다.

그 중요성을 증명하듯 한미수호조약 제8조에는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홍삼은 해외로 가지고 나갈경우 처벌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내년부터 홍삼전매제가 폐지돼 홍삼의 가공판매가 자유화된다고 한다.

당국이 품질인증제 도입등 검사제도를 대폭강화하고 재배면적과 재배과정
수확량을 정부가 관리한다지만 품질유지가 제대로 될지 걱정이다.

고려인삼의 종주국으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5년은
길러야 하는 재배연항 위장등 품질저하를 막는 여러가지 방도가 강구돼야
할것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