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 현대경사연 동향분석실장 >

엔고가 퇴조하고 있다.

지난 4월에 달러당 79엔 대로 하락하였던 엔화 환율이 최근 99엔 수준까지
상승하면서 이제는 엔고가 아닌 "엔저시대"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하락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미국과 일본간에 엔고
저지를 위한 정책협조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엔고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본은 외환 시장 개입 금리 인하 해외투자
완화등 강력한 엔저 유도 정책을 펴고 있으며, 미국도 엔고에 따른 일본의
경기 침체가 미국 경제에 마이너스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적극적으로 달러가치 부양을 위한 시장 개입에 나서고 있다.

세계 기축 통화로서 강력한 달러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열망과 내년에 있을
미대통령 선거, 미일양국의 금리차 확대,미일 주식시장의 엇갈리는 명암등도
달러화 가치 반등의 요인들이었다.

이러한 엔화 가치 하락이 언제까지, 또 어느정도까지 지속될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한 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다.

단기적으로는 엔고 저지를 위한 미국의 정책 공조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불확실한 데다가 장기적으로도 엔화 환율의 균형 수준이 얼마인가에
대한 전망이 크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엔화 환율을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미일 무역역조 문제이고,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에서의 가격차,
즉 구매력 평가이다.

먼저 미일 무역 역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로서
단기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미일간의 무역 역조가 시장의 가격 조절 기능을 통해 해결되기 위해서는
엔화 가치가 높아져야 한다.

일부에서는 엔화 환율이 60엔 밑으로 절상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
되고 있다.

반면 구매력 평가에 의한 경우 엔화 가치는 지나치게 고평가되어 있다.

일본에서의 물건값은 미국에 비해 지나치게 비싼 편인데 이 둘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엔화 환율이 150엔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밀턴 프리드먼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는 얘기하고 있다.

장기적인 전망이 크게 엇갈릴 때 환율 변동은 유행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엔저가 대세인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우르르 엔화를 팔려하고 반대로
엔고가 대세인 듯 싶으면 엔화를 사려고 아우성을 치게 된다.

현재로서는 엔화 환율이 연말까지 대략 95엔과 100엔 사이에서 움직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다소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엔저 대세에 대한 외환
시장에서의 기대감이 커지는 경우 엔화 환율은 쉽게 100엔대 이상으로
올라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라거나 미일무역역조가
조금씩 개선되는 조짐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크다.

"엔저 시대"의 도래는 한국 경제에 치명타를 입힐 수도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에 좌우되는데 엔저가 심화되면 그동안 엔고로 밑받침
되던 수출 경쟁력이 크게 잠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기 정점이 가까워 오는 상황아래서 엔저가 가세할 경우
그 부정적 파급 효과는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엔저가 몰고 올 두가지 부수적인
효과이다.

하나는 엔저에 따른 대일 수입 단가의 하락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증가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이다.

대일 수입 증가는 대일 무역수지 악화라는 문제와 함께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우리나라 산업의 대일 의존도를 더욱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투자 심리의 냉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 하강이 심각한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데는
무엇보다도 기업가들의 투자 심리 위축이 큰 역할을 했다.

엔저로 수출이 위축되면 이것이 투자 위축을 초래하고 그러한 투자 위축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면서 다시 수출 감소로 연계되는 악순환이 초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경제는 지난 3저 호황기 이후의 심각한 경기 침체를 또다시
겪게 될지도 모른다.

엔저의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적절한 원화
환율 수준을 유지해 수출이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기업가들의 투자 의욕이 꺾이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하다.

자본재및 부품.소재의 국산화를 통해 대일 의존도를 줄여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산업 정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업 자신의 경쟁력 제고 노력이다.

이번의 엔저를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새로운 "도전의 장"으로 여기는
적극적인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