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3차회담이 개최 하루를 앞두고 무산됐다.

그 경위는 이렇다.

15번째 쌀수송선으로 지난달 31일 포항을 떠난 삼선비너스호는 1일오후
청진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2일낮 이양천1등항해사가 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곧바로 북한당국에 적발된 이씨는 필름을 빼앗기고 모처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북한은 이같은 사실을 2일밤 우리정부측에 통보했다.

이에 정부(대한무역진흥공사)는 4일과 6일 조선삼천리총회사에 전문을 보내
<>선장과의 직접통화 <>북측 조사결과통보등을 요구했다.

7일에는 이석채재경원차관 명의로 전금철북측대표에게 전문을 보내 이
사건을 대표단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자고 촉구했다.

북측은 그러나 8일밤 전대표명의로 전문을 보내 "이씨의 촬영행위는
계획적인 정탐행위이자 도발행위이므로 남측은 사죄및 재발방지를 약속
하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3차접촉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9일오전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열어 3차회담연기와
쌀제공 중단키로 했다.

문제는 이씨가 설령 사진을 찍었다 해도 그것이 회담중단으로 이어질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냐는 것이다.

남북은 이번 쌀지원합의과정에서 북한항구내에서의 사진촬영에 관해 별도로
합의한게 없다.

다만 우리측선박은 이제까지 북한항에 들어갈때 무전기등 각종장비들을
봉인한후 하역이 끝나면 다시풀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씨가 사진을 찍었다면 호기심차원에서 카메라를 몰래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다.

정부의 한 당국자도 "청진항은 군사항이 아니어서 사진의 정보가치가
없다"고 말해 호기심차원의 돌출행위 가능성을 시사했다.

정부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지난번 인공기게양때 "자존심"을 상한 북한
강경파가 역공을 취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일부 북한당국자들도 이번 사태를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정부
당국자)고 한다.

아직도 북한이 "받아내야할" 쌀이 7만5천t이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사건이 터져 걱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번 사진촬영 사건은 지난번 인공기파문과는 달리 파장의 폭이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번 사건으로 북한내 강경파의 입지가 커질 경우 3차회담은 물론
당국간회담 자체가 "물건너"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쪽도 남쪽대로 여론이 강경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우성호와 안승운목사가 송환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선원들이 억류됐으니
"차라리 쌀제공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질 수도 있다.

회담무산은 앞으로의 남북관계도 경색국면으로 몰고갈 공산이 크다.

더욱이 당국대화채널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끊어질 경우 북한의 대남공세는
한층 기승을 부릴 것이고 이는 경수로지원사업에도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가깝게는 광복50주년을 맞아 정부가 준비했던 8.15대북제의도 알맹이가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무산되버릴 공산이 크다.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태세에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일 북측으로부터 사건개요를 통보받고도 외부에 이사실이
알려질까봐 "쉬쉬"로 일관했다.

6일 하역을 끝낸 비너스호가 현재까지 억류돼있는데도 8일저녁까지 "3차
회담은 예정대로 개최된다"고 큰소리쳤다.

이같은 정부의 태도는 아마추어수준의 대북전략에도 기인하지만 근본적
으로는 "국민에 대한 신변보장"과 "알권리"는 무시한채 회담만 성사되면
된다는 "성과우선주의"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김정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