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업계가 국제무대에 선지는 불과 십수년에 불과하다.

관련 업무가 발전을 거듭하며 복잡다기해진 뒤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초창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법부재인 듯한 난제도 우연한 실마리로 해결될때가 많다.

한국 자본시장 자유화의 효시로 평가되는 외수펀드 1호 KIT(Korea
International Trust).한국투신이 KIT를 탄생시킬때까지 겪었던 온갖 문제도
우연한 계기로 풀려나갔다.

"시바스 리갈 4병",그리고 "맨땅에 박치기가 무색한 실무자들의 배짱"
이었다.

외수펀드의 출발점은 정부가 필리핀의 ADB총회에서 한국 증시의 단계적인
개방을 발표한 80년 초였다.

"그해 6월께 재무부관계자,심정수 증감원 국제과장(현부원장보),임윤식
거래소과장(현엘지증권이사),투신 증금 외환은행관계자등 8명으로
"한국증시 개방일정 준비위원회"가 발족됐고 너댓달 검토끝에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을 발행한 뒤 외국인 직접투자는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81년 재무부 연두 업무보고에 반영돼 외수증권 설정이 구체화됐지요
" 박정인 한투 주식운용부본부장(준비위멤버,당시 한투국제과장)의 회고.
이 직후 투신업계에 외수펀드 설정이란 과제가 떨어졌고 한국투신은
외수증권 설정위원회(위원장 이준상상무,현증안기금이사장)와 국제업무실
(실장 한청수,현 상무)을 설치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수요처 확보차원에서 해외기관들을 수차례 만났지만 반응은 미지근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접촉한 곳이 CSFB(Credit Swiss First Boston). 김홍석 당시
한투사장이 외환은행 근무당시 발행했던 FRN의 주간사였다는 인연으로
가능했다.

몇차례 상담후 CSFB측 관계자들은 가능성이 없다며 귀국의사를 알려왔고 한
투측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국 전날 술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귀했던 "시바스 리갈 4병"을 들고서였다.

참석자는 김사장 이상무 한실장과 CSFB측의 답 히긴슨 상무와 앤드류 코너
동경사무소장.장소는 종로구청 뒤편의 한정식집. "처음에는 술을 권해도
반응이 없어요.

김사장이 제안을 하더군요.

화살표가 그려진 달걀을 쟁반위에 뱅그르 돌려서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은 벌주를 마시자는 거였어요.

분위기가 갑자기 흥겨워 지더군요"(한상무) 누가 누구를 바래다 줬는지
모를 정도로 모두가 기분좋게 취했다.

다음날 비행기까지 놓칠 정도로 숙취에 시달리던 코너로부터 한상무는
자기 귀를 의심할만한 얘기를 들었다.

"There''s no "maybe"" 어떤 일도 도와주겠다는 얘기였다.

코너는 한투측이 그토록 찾던 참고자료(브라질 외수증권 발행사례)까지
넘겨 줬다.

다만 첫 발행인 만큼 규모는 1천5백만달러로 제한하자고 했다.

CSFB측의 호의로 순풍을 탄 것도 잠시,실무작업은 난항을 거듭했다.

법.관행.세제등에서 국내업무와 너무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걸음마를 갓 시작한 아이에게 장애물 통과를 요구하는 꼴이었다.

상식수준에서 절차를 밟았지만 가끔은 배짱도 부려야 했다.

외수펀드 관련법을 놓고 한상무(국내법)와 코너(국제법)가 고성을
높이면서 다퉜고 과세문제에 대해 박부장(이중과세 불가)과 재무부 실무자
(적용)가 대립했으나 결국 "맨땅에 박치기식"의 배짱으로 밀어 붙여
판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대한투신과 먼저 설정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져 다섯달가량 내리 합숙
도상훈련을 벌인 탓에 실무자들은 "코피꽤나 쏟는" 어려움을 겪었다.

오성근런던현지법인사장, 허과현기획팀장, 신용택수원지점장,
김법인CS홍보팀장과 베어링증권의 조봉연이사 전길수 슈로더
서울투자신탁소장등이 "고행자 명부"등재자들. 업무여건이 미숙해 서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해프닝도 속출했다.

1장짜리 약관을 들고 CSFB측 변호사를 만났다가 외국약관은 1백페이지가
넘는 세밀한 것임을 알고 서둘러 재작성했다.

전문용어도 서툴러서 해석과 번역에 진땀을 뺀 것은 당연지사였다.

타자로 사업설명서를 만들다가는 제시간에 제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홍콩에 제작을 의뢰했는데 나중에서야 워드프로세스라는게 있음을
알았다.

마무리 단계때는 한국 수익증권은 변조가 쉽고 매매가 불편한 기명식이라는
항의가 들어와 결국 IDR을 발행하기도 했다.

우여곡절끝에 한국투신은 81년 11월 19일 런던에서 KIT 설정조인식을
가졌고 귀국한 관계자들은 회사측이 안겨준 꽃다발에 묻혀 그동안의
피로를 씻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하긴슨과 코너는 한투에 호의를 베풀어 수익을 못냈다는
눈총을 받고 결국 회사를 옮겨야 했다.

"한국에 가면 시바스 리갈을 조심하라"는 말을 런던금융계에 유행시키면서
.....

<박기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