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높다. 국적있는 세계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체성 있는 세계화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2월 서울대학교 총장을 마친 뒤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종운박사는 요즘 이런 "화두"를 안고 있는 학계 원로다.
그는 조선시대때 대제학 3명을 배출한 연안 김씨로 연흥부원군의
12대손. 김이사장은 연안 김씨 가문의 네번째 대제학(서울대 총장)을
거쳐 요즘은 "국적있는 학문" "국적있는 교육"을 정립하는 새로운
중책과 씨름하고 있는 셈이다.
김이사장은 영문학자로 30년 이상을 서울대 강단에 섰다. 그러는
틈틈이 어학연구소장 미국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 기획실장 교무처장
부총장등의 보직도 두루 거쳤다.
"학자"로서뿐 아니라 "교육행정가"로서도 두루 경륜을 쌓은 김이사장을
만나 그가 요즘 되뇌고 있다는 "화두"를 같이 새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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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에 서울대 총장 임기를 마치고 바로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직을
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단에선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김이사장=학술진흥을 위해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이사장 취임이후 지금까지는 주로 연구지원체계를 정비하는
등 재단의 중장기 발전계획을 마련해왔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사장인 내가 해야 할 일은 재원 마련입니다.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려면 연구기능의 강화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수적이지 않겠습니까.
-학술진흥재단에선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연구비를
지원한다던데 이래저래 돈 들어갈 곳이 많은 모양이군요.
<>김이사장=그렇습니다. 그러나 재원이 모자라 외국인들의 한국학
연구에 대해선 충분한 지원을 못해주고 있습니다. 대신 국제교류재단에서
별도로 외국인 학자들을 후원해주고 있습니다.
-외국인 학자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으로 봅니다. 유럽
한국학회가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열고 있는데는 진흥재단의 재정적
후원도 적지않은 몫을 했다고 들었거든요. 외국 지식인들에게 한국을
바로 알리는 지름길의 하나가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을 적극
지원해주는 일이 아닐까요.
<>김이사장=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때마침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한국학에 대한 각국 학자들의 관심도 무척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주 유럽 지역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우리로서는 한국을 올바로 알릴
물실호기가 조성되고 있는 셈이지요.
예컨대 유럽한국학회 학술회의가 지난 4월에 열려 가 보았는데 17개국에서
1백60여명이나 되는 학자들이 모였더군요. 수십편의 논문도 발표됐고요.
한국학 내지 한국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기가 그만큼 높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유럽한국학회의 학술대회는 올해로
17년째를 맞았을 정도로 전통을 다져가고 있어 아주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참가했던가요.
<>김이사장=동유럽 학자들이 많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게중엔 대학 학부시절부터 작정을 하고 한국을 공부해왔다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대부분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학을 연구해 온
사람들이지요. 특기할 사실은 이 학술대회엔 북한 학자들도 계속
참가해왔다는 점입니다.
금년에도 북한학자 5명이 참석해 논문 3편을 발표했지요. 어떤 의미에선
이 학회가 동서진영의 가교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학술대회를 우리 재단이 지원했다는 건 의미가 크지요.
앞으론 동서뿐 아니라 남북을 잇는 매개체로도 작용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집디다.
-말씀을 들어보니까 유럽에서 한국학 연구의 물꼬를 튼 원조는
서유럽이 아니라 동유럽쪽인 셈이네요.
뒤집어 말하면 한국이 서방에 지원한 "한국학"보다는 북한이 동유럽
국가들에 지원한 "조선학"이 더 발전돼 있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이사장=꼭 그렇게 말할 순 없지요. 다만 한가지 분명하게 느낀
점은 서울유학을 다녀온 서유럽학자들보다는 평양에서 공부한 동유럽
학자들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훨씬 뛰어나더라는 사실입니다만.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김이사장=평양에선 외국사람이 외국말을 하며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외국사람이 외국말로 사는데 그리 불편을 겪지 않지요.
그게 한국어 구사능력의 차이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일 겁니다. 단적으로
현재 서울에 와 있는 헝가리 러시아 중국등의 대사들은 우리말을 한국사람
못지않게 잘 합니다. 미국 영국같은 나라의 주한대사들은 한국말이 아주
서툰 것과 대조적이지요.
구북방지역의 한반도전문 외교관들은 모두 평양의 김일성대학등에서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그런 차이를 일으키는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한국말을 잘하면 곧 한국학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식의 등식이 성립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해당지역의 언어구사가 지역학의 필요충분조건까진 안될지 몰라도
필요조건인 것 만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우리도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이사장=물론이지요. 외국에 대해 공부하려면 우선 그 나라 언어부터
습득하고,그 다음 역사를 알고난 뒤 정치나 경제 사회 음악등 전공분야를
공부하는게 정도지요.
한국을 다른 나라에 소개하려면 우선 되도록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말
부터 가르쳐 주는 일이 긴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해외에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니 되도록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많이 공부시켜 한국을 올바로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인 것 만은 분명하겠지요.
그런데 한국학이 꽤 뿌리깊게 연구돼 왔다는 일본에서 역사교과서
왜곡이 특히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김이사장=어떤 목적을 깔고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지,
한국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보는 게 온당할 겝니다.
-그렇겠군요. 역설적으로 일본이 한국관련사를 왜곡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한국에 대한 연구성과가 치밀하게 축적돼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미국학 일본학 영국학 같은 외국학연구는
이만저만 부족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외국학 자체는 커녕 연구의 출발점이 되는 외국어 교육체계 조차 제대로
안갖춰있는 형편아닙니까.
단적으로 우리가 일본학 연구저변을 넓히려면 일본어교육부터 잘 시켜야
하는데 최고 국립학부라는 서울대학교에 일본어과가 아예 없는 실정이지요.
그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김이사장=일본을 잘 알기 위해선 우선 일본말부터 잘 해야 한다는
견해에는 동감입니다. 서울대에 일문과를 신설하는 문제도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고 봅니다.
-서울대에 계실때 미국학 연구소장도 맡으셨지요. 미국측으로부터
적지않은 지원을 받았을텐데요. 우리나라가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를
지원하는 수준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김이사장=미국사람들이 미국연구를 하는 외국학자들에게 지원하는
돈은 정말 엄청납니다. USOM 아시아재단 민간재단등 여러가지 형태의
지원이 있지요.
서울대의 경우 미국독립 2백주년을 기념해 지난 76년 미국학연구소를
창설했는데 이때 미국정부가 현금 5만달러를 보내 줬습니다.
책도 수천권 보내 주었고요. 물론 이런 노력은 미국이 그들의 친구를
많이 만들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요.
우리가 해외 학자들에게 한국학 연구를 지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한파 친한파를 많이 만들자는 얘기 아닙니까.
-미국이 각국의 유학생을 많이 받아 들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요.
<>김이사장=물론입니다. 미국의 경우엔 일류대학의 기준을 외국인
유학생 비중으로 따질 정도입니다. 전체 학생중 외국인 학생의 비율이
10% 이상은 돼야 일류라는 얘기를 듣지요.
실제로 하버드대 스탠포드대등엔 외국인 학생의 비율이 10%를 넘습니다.
외국학생이 제발로 찾아올 만큼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야 진정한 일류가
될 수 있다는 게 미국 대학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엔 일류대학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한국 대학들의 세계화를 위해서도 되도록 많은 외국인 학생들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김이사장=그렇지요. 한국 학생들이 외국 대학에 많이 나가서 공부하는
것도 세계화의 한 방법이지만 외국 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여야만 쌍방향
에서의 입체적인 세계화가 가능할 것입니다.
대학교수들 중에는 국내 학생이 들어갈 자리도 없는 마당에 웬 외국
학생이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단견의 소치일 뿐입니다. 외국 학생들에게 국내대학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줘야 합니다.
-세계화 얘기가 나와서 말씀입니다만 요즘 추진되는 세계화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김이사장=누군가 총정리를 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너도나도 불쑥
불쑥 "세계화" "세계화"하는데 세계화의 근본은 개방이거든요. 개방이라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쭉 이어져온 하나의 도도한
흐름입니다.
처음에는 무력에 의한 개방이 있었지요.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대왕등의
세계 정복은 무력으로 국경을 부순 것이긴 해도 분명한 세계화
작업이었지요.
그 다음은 종교를 통해 국경을 없애는 작업이 이어졌고. 그리고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세계화를 이루고자 했던 게 바로 인류 역사였지요.
공산주의야말로 전형적인 국제주의 이데올로기였거든요.
-인류역사가 개방이나 세계화 쪽으로 흘러온 데는 어떤 필연적인
동인이 있었을 텐데요.
<>김이사장=경제가 중요한 동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력으로 세계화를
이루려던 사람들의 목표는 전리품과 노예 획득이었던만큼 경제적인 요인이
작용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종교를 통한 세계화에도 경제적인 동인이 많습니다. 그리고 정치이념을
통한 국제주의에도 경제적 목적이 바탕에 깔려 있지요.
요컨대 방도가 무엇이었건 그 이면에는 다 "경제"가 인류사회의 개방과
세계화를 재촉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온 셈입니다.
-인류 역사의 방향 자체가 세계화였다면 우리가 지금 새삼스럽게
세계화를 운운하는건 뒤늦은 감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화시대에 한국이 확실한 일류국가로 자리잡으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겠지요.
<>김이사장=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세계화의 기지로 삼자는
주장을 합니다. 대학에는 모든 게 다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학 역사 언어등등 대학의 학과조직 만큼 다양한 분야가
없지요. 여기에 투자를 잘하면 세계화는 저절로 잘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교육개혁위원회가 내놓은 교육개혁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이사장=과거의 교육개혁이 대분분 대학입시 문제만을 다룬
단편적 접근이었던데 비해 이번에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일관성있게 전교육체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실천엔 어려움이 많이 따를 겁니다. 특히 대학을 교육중심 연구
중심 산업중심등 세가지로 나눈다고 했는데 누가 그런 분류를 하느냐가
문제지요.
또 입시에서도 국립대의 학교별 시험을 없애고 사립대학은 자유화한다고
했는데 그건 잔꾀라고 봅니다.
국립대학과 사립대를 구분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서울대 하나만을 집어 내기가 곤란하니까 국립대학이라는 말을 쓴
모양인데 서울대가 시험을 폐지하면 다른 대학도 자동적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을게 뻔합니다.
-시험을 안보게 하는게 과연 능사일까요.
<>김이사장=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재작년에 서울대는 자연과학분야
수험생들겐 영어시험을 안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년의 영어수준이
크게 떨어졌여요. 시험은 학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청소 검사를 해야 청소가 깨끗이 되는 것과 같지요.
시험이 나쁜게 아니라 시험을 치루는 사람이 고액과외 쪽집게과외
따위를 하는게 나쁜 것이지요.
학교에서 배운 것 외에 더 배운다는 의미의 과외공부는 좋은 겁니다.
감수성 예민하고 체력도 감당할만한 나이에 집중적으로 많이 공부하는
건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그게 병적으로 타락한게 잘못이지요.
자본주의의 원리가 공개경쟁인데 입학시험에서만 그 원리를 배제한다는
건 이해가 안됩니다.
-학자로서나 연구행정가로서 꼭 이루어 보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입니까.
<>김이사장=나는 30년 넘게 서울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3분의 2이상은
교내에서 뭔가 보직을 맡았었습니다. 연구에만 전념한 교수들에 비해선
폭넓은 교육행정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셈이지요.
그런 경험을 회고하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회있을 때마다
과거 겪고 느낀 것들을 글로 옮겨쓰고 있습니다.
교수나 학생 대학 교육등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책으로 한번 펴낼 생각입니다.
[대담=유화선 산업1부장]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