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콸라룸프르에서 발표된 북·미 공동합의문은 명시적인 표현은
안했지만 사실상 북한에 제공될 경수로가 ''한국형''이고 ''중심적역할''을
맡을 나라가 한국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대로 북·미합의가 이행된다면 남북관계는 조만간
풀릴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해볼 수도 있게 되었다.

더구나 북경에서 남북한간에 쌀회담이 이루어져 우리측이 아무런
조건없이 15만t의 쌀을 북한에 제공할 방침이고 북한은 민간차원의
쌀제공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방식과 절차 문제만 협의가 되면
한국의 쌀은 북한에 즉시 제공될 전망이다.

이러한 움직임도 앞으로 남북한 관계가 풀릴 것으로 보는 시각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일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북한의 대남 기본태도가 변했다는 조짐이
없어 남북관계 개선에 기대를 걸수 없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많다.

콸라룸푸르 합의직후 기자회견에서 김계관 북한외교부 부부장은
"남조선 당국이 지난해 7월에 만든 걸림돌(김일성 조문파동)이 남아
있어 현재 남북대화 분위기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해 남북관계가
가까운 시일에 풀릴 것이라는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의
전략의도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북한이 최근들어 그동안 지연시켜오던 경수로 제공문제를 마무리짓고,
곧 이어 이제까지 상대를 거부하던 한국과의 쌀회담에 응해온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콸라룸푸르 북·미경수로 협상타결은 북한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위기
모면, 그리고 김정일의 지도력을 과시한다는 측면에서 북한에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확고한 한·미·일 공조때문에 협상에서 명분과 실리를 함게
얻지못할 바에야 한국형 경수로를 시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실리를
얻으려 한것이다.

즉 북한은 미·일을 비롯한 주변국가들과의 승산없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실리추구로 당면문제를 해결한다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한편 북한의 쌀지원 요청은 식량사정 악화에 따른 위기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대비하여 선심용 식량을 준비하는 한편
북·일수교 교섭을 재개하여 조속히 경제적 지원과 배상을 일본으로부터
받아냄으로써 경제난을 해소코자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쌀제공을 위해 당국자간 접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한국측이
분명히 했음에도 이를 북한측이 수용, 차관급대화를 갖는 것은 이미
쌀제공의사를 명확히 한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대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사실상 받아들이고
당국자간 접촉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경수로 문제와 쌀협상을
신속히 매듭지으려는데 목적을 두었을 가능성이 크며 현재로서는 남북
대화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진전이라고는 볼수 없다.

북한이 남한당국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계기가 얼마나 남북대화를 진지하게 이끌어 나갈수 있겠느냐가 문제이다.

즉 한국형 경수로나 쌀제공 문제가 전반적인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당국간의 대화로 이어질수 있을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이 김일성사망(7월8일) 1주기가 지난후 어차피 김정일을 당총비서직
에 앉힐 준비작업으로 남북대화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것이라면 당총비서직
에 취임한 이후 남북대화는 실종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최근 북한은 경수로 문제를 성공적으로 타결시켰다고 주장함으로써
김정일의 통치력을 주민들에게 과시하고 있다.

이제 쌀문제만 해결되면 김정일이 당총비서직이나 주석직 취임에 따른
''선물''도 마련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남북대화 재개를 통해서 북한
사회를 남한에 개방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남북대화가 전반적인 진전속에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합의대로
이행하게 되면 남북한 사회는 상대방에게 개방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아직 이를 수용할수 있는 체제의 재정립과정을 거치지 않은
북한이 그러한 변화를 수용할수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라서 현재 북한의 최대 관심은 경제적 위기모면, 국제적 고립탈피,
김정일 승계 여건조성 등의 당면목표달성에 있으며 전반적인 남북관계
개선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북한은 개방에 대한 체제의 자체조정 능력신장에 역점을
둘 것이며 이에 자신이 있다고 판단될때에 남북공존 원칙을 내세워 체제
지속을 위한 진지한 남북대화에 응해올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우리의 대응은 북한의 전략의도를 분석하면서 그에 따라 대응하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고 북한의 대내외적 상황을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북한의 대남 기본구도를 바꾸어 놓는 적극적인 자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목표와 원칙을 가지고 조급하거나
들뜬 생각을 버리고 차분하게 인내와 끈기고 대북정책을 추지해 나가야
할 것이 요망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