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채가 보옥의 옥구슬을 돌려주자 보옥도 보채의 기명쇄를 돌려주었다.

보채가 보옥의 두툼한 겨울옷 차림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보옥이 보채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대답을 하려다 말고 코끝을
위로 치켜올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였다.

"이게 무슨 향기야? 누나 몸에서 나는것 같은데"

"향기라니. 난 옷이나 몸에 향수를 뿌리는 적이 없는데. 공연히 옷에다
뿌렸다가는 옷만 망가지기 십상이지요"

보채는 보옥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지만 주로 높임말을 쓰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반말을 섞어 쓰기도 하였다.

"이상하다. 전에 한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인데. 이게 뭘까?"

"이제 알았어요. 내가 아침에 먹은 환약 냄새인가봐. 냉향환이라고.
기침병에 특효약이지요. 그 약 먹고 오늘은 몸이 가뿐해요"

보옥은 그 냄새가 좋은지 아예 코를 보채의 목덜미나 어깨에 대고
킁킁거렸다.

보채는 보옥의 코끝이 살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호. 약인데 아무나 먹을 수 있나요? 아프지도 않으면서"

"나, 그 약 먹고 싶어. 아프면 되잖아"

보옥이 머리를 보채의 무릎에 대고 드러누우며 아픈체하려고 하였다.

보채는 보옥의 머리가 허벅지 근방을 누르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루종일 잠잠했던 기침이 터져나올 판이었다.

보옥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슬그머니 수작을 거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또 다른 시녀가 들어오면서 아뢰었다.

"대옥 아씨가 오셨어요"

그러자 보옥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하며 앉았다.

"아이구머니나. 보옥 도련님도 와 계셨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것을"

이미 보옥이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옥이 능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 표정은 시기로 가득 차 새초롬해져 있었다.

"아니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여기 따뜻한 데로 와서 앉아요"

보채가 벌떡 일어나 대옥을 반겼다.

"아무래도 잘못 온것 같아요" 대옥이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보옥의 태도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보옥에게서 자기를 반기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었다.

보옥도 대옥의 마음을 아는지라 반기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