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를 태워온 북한 원자로의 한국형 경수로 대체문제가 타결단계에는
접근했으나 막판에서 북한이 억지를 계속할 경우 원점회귀도 불가피한
단계에 와있다.

북의 태도에 비겨 정부의 반응은 냉담할뿐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입장 반영을 다짐받는 정도로 긴박하다.

상대가 상대인 데다 주제가 핵탄제조에 관련된 민감사항이니 만큼
최후까지를 보지 않고 성사를 장담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북이 남에서 설계 제작한 원자로를 남의 기술진이 가져와
설치하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근본태도 변화하나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남북 격차를 공인하는 계기도 되지만 그 내부적 파장은 체제
존립에 미칠만큼 심대하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자면 위선자의 자업자득이다.

이제 버틸만큼 버텨 왔다.

손으로 해를 가리는 우를 더이상 범하기 보다 도탄에 빠진 경제를
부흥하는데 매진할 마지막 기회다.

오직 남은 선택은 개방의 물결을 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미.일에 접근하는 것은 현명한 전략이다.

그러나 매사엔 순리가 있다.

앞선 쪽을 시샘,외면만 하지 말고 이제 말문을 터 상부상조의 길을
찾는 일이 먼저다.

한국형 수용이 부득이함을 판단하고 결심한 이상 속히 마무리짓는
것이 현명하다.

40억달러의 원자로 연불 부담도 쉬운 일이 아닌데 10억달러 부대설비
추가요구는 사실 두 경우,몰염치다.

그것도 실제 짐을 떡맡을 상대와의 대화는 마다하고 부담안질 나라한테
조르는 짓은 무모하다.

미.일 당국도 이 점과 관련해 북을 설득함에 진심을 보여야 한다.

한.미.일등 모든 관련국 정부나 국민은 북한핵무장의 저지는 하나의
중간 목표이며 불전 평화정착 상호교류와 번영이야 말로 한반도 통일을
보장하는 최고목표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확인이 없을 때 미국은 당장의 체면에만 매달려 북의 억지요구를
마냥 수용해 회담성사를 서두름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고차목표달성을 그르치게 된다.

한국에 앞선 대북 쌀제공 요구에 말려드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공동보조를 취해온 우방들로서 남북접촉 성사를 통한 지역
평화의 추구보다 대단치도 않은 장래의 경제이익에 매달리는 미.일의
얄팍한 태도는 대국들의 행동치고는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아직 문안이 밝혀지진 않았으나 경수로 문제에 있어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
(KEDO)의 결정이라는 우회적 표현을 쓴 것까지는 북의 처지를 이해할수
있다.

그러나 한국입장에 관한 그 외의 어떤 불분명한 표현도 시정돼야 한다.

한국이 주객전도로 언제까지나 소외될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은 10억달러나 되는 부대비용을 실제 부담할
한국 일본과는 면대도 없이 북이 미국과 단둘이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북한은 벽창호 생떼라 치면 미국은 무슨 논리인가.

이것이 남북 직접협상의 몫이 아니면 무엇이 의제인가.

이젠 한국정부로서도 국민에게 더 이상 물러나겠다는 구실을 찾기
어렵고 구차하게 됐다.

북한이나 미국은 이점을 통찰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