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많은 대기업 노조들이 재야 노동단체인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의
임금.단체협상 투쟁지침에 따라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닌 무리한 요구안을
회사측에 내놓고 있다는 소식이다.

즉 민노준소속 104개 노조가 의료보험적용확대,세제개혁,국민연금 관리
개선,대기업그룹 경제력집중 규제등 사회개혁 요구를 임.단 협상안으로
제시해 놓고 있어 올해 노사협상에서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법외 노동단체라는 민노준의 투쟁지향적 성격상 산하 노조들의
이같은 무리한 요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노동운동의 경제.실리 주의가 국내에서도
뿌리내리기를 기대하는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100여개의 대기업들이 임.단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임금문제를
뒷전으로 밀어 놓은채 기업의 힘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같은 작업장 외적인 문제들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특히 노사협상의 본질을 떠난 이러한 문제들은 오는 27일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올해 노사분규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틀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오늘날 선진국 노조들이 내세우고 있는 "노동운동의 경영자주의"에서
접근해본다면 근로자 한사람 한사람이 경영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IBM 모토롤라등 선진 대기업들이 고용안정과 합리적인 대우라는
노사협상의 본래목적에 충실하면서 자율과 유연성에 입각한 참여
메커니즘을 활용해 조직에 고도의 창조성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노동환경은 작업장 안의 현실과 밖의 현실이
상당부분 맞닿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작업장 외부의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작업장 내부의 근로환경을
개선하려는 시도는 얼핏 보아 모순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선진형 노사관계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노조도 산업사회의 한
주체로서 근로자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권리와 함께 기업과 국민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할 책임이 있다.

새시대의 노조는 노사 모두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백화점식으로
늘어놓는 전시적 단체협약보다 일반적 지도원리(General Principles)에
대한 합의를 중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기본 정신에서 볼 때 임.단 협상은 "최소한의 합의"가
가장 바람직하다.

간결하고도 투명해야 한다.

복잡하거나 불순물이 끼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낭비적이기 쉽다.

간결해야만 실천이 가능하고 그 합의가 노사모두에게 족쇄로 작용하는
역기능을 막을수 있다.

노동운동을 정치.사회적 투쟁과 연계시키려는 투쟁 지상주의적
기도는 이제 후진국에서조차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민노준 등의 법외노 동단체가 다가오는 임투의 최대고비에서 상궤를
벗어난 사회개혁 요구를 마지막 무기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