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조선전기 도자의 연구' 펴낸 김영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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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는 왕실의 상징이었습니다. 경국대전을 보면 법으로 일반서민의
백자사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사회질서가 문란하게 되면서
백자가 대량 유출 매매돼 일반인들의 기호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죠"
"조선전기 도자의 연구"(학연문화사간 1만원)를 펴낸 김영원씨
(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는 도자기의 모습을 통해 조선사회의 변천
과정을 알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책은 백자의 제작과정및 유통경로를 통해 조선사회사의 단면을
살피고 있다.
도자의 형태에 따른 시대구분,분원의 설치배경및 역할,공납자기와
진상자기의 차이,도자양식의 변화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조선초기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공물로
왕실에 납품되었습니다.
질좋은 분청사기와 백자들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지요" 김씨는
1년에 2~3회 거두어 들이는 이러한 공납자기체제가 사회정치적인
변화가 생겨난 예종때부터 흔들렸다고 전한다.
"예종대에 이르면 정치.사회의 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해요.
세조말무렵부터 보이던 조짐이 심화되는 것이지요.
특히 광주요의 분원이 설치되면서 조선조 도자기의 전국적인 생산및
수급체계에 큰 변화가 생겨요.
중앙가마와 지방가마가 구분되고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분청사기가 더욱 힘을 잃어갔습니다" 분원의 설치가 도자사는 물론
조선조 사회질서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국가와 왕실의 관심이 백자에서 청화백자로 옮겨지게된 데에는
대량으로 유입된 명자기의 역할이 컸습니다.
나라에서는 청화백자의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분원을 설치하게 됐죠"
분원의 설치는 왕실용 순백자의 대량생산과 청화백자의 제작및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차츰 지방의 가마가 쇠퇴하게
됐다고 얘기한다.
분원에서 나오는 도자기는 공납이 아니라 진상물로서 봉상하게 되었다는
것.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보인 성종시대에 실은 분원도자기의 일반유출이
심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이때 중국의 백자를 밀수입,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도자기가 달랐던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성종조부터 조공무역이 감소하면서 비공식적인 사무역이 증가,사치품이
유입되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해짐에 따라 조선도자는 설 땅을 잃어갔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인해 조선도자는 차츰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앞으로 분원백자와 명대백자와의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시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서울대고고학과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을 거쳐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재직중이다.
저서로 "조선백자"가 있으며 "중국도자사"를 번역 출간했다.
< 오춘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4일자).
백자사용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사회질서가 문란하게 되면서
백자가 대량 유출 매매돼 일반인들의 기호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죠"
"조선전기 도자의 연구"(학연문화사간 1만원)를 펴낸 김영원씨
(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는 도자기의 모습을 통해 조선사회의 변천
과정을 알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책은 백자의 제작과정및 유통경로를 통해 조선사회사의 단면을
살피고 있다.
도자의 형태에 따른 시대구분,분원의 설치배경및 역할,공납자기와
진상자기의 차이,도자양식의 변화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조선초기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에서 제작된 도자기는 공물로
왕실에 납품되었습니다.
질좋은 분청사기와 백자들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지요" 김씨는
1년에 2~3회 거두어 들이는 이러한 공납자기체제가 사회정치적인
변화가 생겨난 예종때부터 흔들렸다고 전한다.
"예종대에 이르면 정치.사회의 기강이 문란해지기 시작해요.
세조말무렵부터 보이던 조짐이 심화되는 것이지요.
특히 광주요의 분원이 설치되면서 조선조 도자기의 전국적인 생산및
수급체계에 큰 변화가 생겨요.
중앙가마와 지방가마가 구분되고 미약하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분청사기가 더욱 힘을 잃어갔습니다" 분원의 설치가 도자사는 물론
조선조 사회질서에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는 지적이다.
"국가와 왕실의 관심이 백자에서 청화백자로 옮겨지게된 데에는
대량으로 유입된 명자기의 역할이 컸습니다.
나라에서는 청화백자의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분원을 설치하게 됐죠"
분원의 설치는 왕실용 순백자의 대량생산과 청화백자의 제작및 안정적인
공급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차츰 지방의 가마가 쇠퇴하게
됐다고 얘기한다.
분원에서 나오는 도자기는 공납이 아니라 진상물로서 봉상하게 되었다는
것.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보인 성종시대에 실은 분원도자기의 일반유출이
심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이때 중국의 백자를 밀수입,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도자기가 달랐던 질서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성종조부터 조공무역이 감소하면서 비공식적인 사무역이 증가,사치품이
유입되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해짐에 따라 조선도자는 설 땅을 잃어갔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인해 조선도자는 차츰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앞으로 분원백자와 명대백자와의 본격적인 비교연구를 시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서울대고고학과및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을 거쳐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재직중이다.
저서로 "조선백자"가 있으며 "중국도자사"를 번역 출간했다.
< 오춘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