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전자 구미공장에 들어서면 정문 왼편 야트막한 본관 건물에 걸린
대형플래카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글씨의 "우리는 하나""세계최고의 노사협력관계 구축"이란 구호가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끈다.

구미공장은 대우전자의 국내 최대 사업장이다.

이회사 1만2천여 종업원 가운데 4천3백여명이 여기서 일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여직원들이 많아 가족적 분위기가 유난히
돋보인다.

사무직 생산직 구별없이 똑 같은 옷을 입고 서로 인사하는 모습이 정겹다.

이 회사 노조는 지난 83년 설립이후 13년째를 맞고 있다.

89년이후 지난해까지 6년째 무분규로 대우그룹의 노사안정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회사노조는 출범 때부터 우여곡절을 겪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대우그룹에서 인수한 대한전선에서 근무하던 강성근로자를 중심으로
노조가 설립됐기 때문이다.

결국 87,88년 두차례 분규를 겪었다.

구미주재임원 송정웅이사는 "당시 분규를 겪은 대기업 가운데선 비교적
상처가 작았지만 앙금이 가라앉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한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노사간의 "자존심 싸움"이 종식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설명이다.

구미공장 근로자들이 임금문제를 무릅쓰고 93년초까지 3시간 이상 잔업과
특근을 거부했던 것도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회사측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서로의 원칙을 견지하는 동시에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나갔다.

송이사는 "회사는 항상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며 강성노조라고 겁내고 연성
노조라고 쉽게 대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털어놓는다.

김수도노조구미지부장은 "조합원들의 실리를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노조가 경쟁력을 높여야 사측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할수 있다"고 지적
한다.

한자리에 격의없이 앉아 "당위성"을 강조하는 구미공장 노사대표의 말에서
원칙을 중시하고 내실을 키우는 "탱크주의"의 근성이 엿보인다.

대우전자 노사는 "내년에는 올해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겠다"는 자세로
매년 차근차근 서로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왔다.

이회사 노사는 지난해 2월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합동경영토론회"를
개최한후 산업평화와 생산성향상을 다짐하는 "노사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노조도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몫하기"의 실천운동에 나섰다.

노조간부들이 지난해 6월 시작한 "탱크제품알리기 운동"과 판촉활동은
전국 사업장으로 퍼져나갔다.

지난달 11일에는 부품업체들과 함께 "대우전자.협력업체 노사합동 전진
대회"를 열었다.

회사측은 또 제도개선을 통한 노사문제해결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전체의 40%나 되는 여성근로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지난해부터 남녀
단일호봉제를 도입했다.

또 생산직 근로자들에게도 사무직과 동일한 승진기회를 부여하는 관리.
기능 단일직책체계를 도입해 올해부터 운영해 오고 있다.

기능직 사원 45명이 기존의 과장급인 그룹장으로 승진했다.

각 단위사업장 노사의 이런 노력들은 최고경영자의 노사문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배순훈회장은 91년 사장으로 취임한 직후 "노사간 불신의 장벽은 회사가
경영자료를 공개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회사가 나가는
방향을 그대로 알려 오해의 여지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재열사장은 노조활동이 종업원들의 "스트레스해소의 장"이라고 말할만큼
진보적이다.

일정한 조직이 있어야 근로자들의 불만이 응집될수도 있고 해소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양사장은 그래서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회사의 어떤 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인 성과도 많았다.

노사가 생산적 노사관계를 구축하면서 이 회사의 생산성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93년부터 노사가 함께 벌인 "탱크주의운동"결과 85년 2천1백만원에 불과
하던 1인당 매출액이 94년에는 10배가 성장한 2억1천2백만원으로 높아졌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종업원들이 비전을 갖게 된 점이다.

회사와 근로자들이 힘을 합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회사가 생산직 직제개편을 통해 제시하려 했던 것도 이런 비전이다.

인쇄회로기판(PCB)생산1그룹을 맡고 있는 이래학그룹장은 그 "비전"을
실감하고 있는 사람이다.

"반장직책만 17년간 맡고 있었습니다. 그룹장이 되면서 목표와 실적부담이
생겨 책임은 무거워졌지만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승진이 가능하다는 희망
을 갖게 됐습니다"

근로자중심의 경영체제 확립으로 "긍지와 보람의 일터를 조성하겠다"는 이
회사의 "중장기 노사비전"이 "탱크주의"와 함께 하나 하나 결실을 맺어가고
있는 셈이다.

< 구미=권영설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