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 있는 신라 경순왕릉(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이
조선영조때 재발견된 경위와 진위논쟁, 봉묘개축과정등이 상세히
기록된 문헌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지학자 김훈영씨(62)가 최근 조선 영조때 작성된 ''경순왕릉묘지판단록''
과 ''경순왕릉묘기'',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담은 ''계첩''등을
찾아 공개한 것.

경순왕릉은 임진왜란이후 위치가 알려지지 않다가 1726년(영조2년)
후손 김시원이 장단(지금의 연천)에서 ''경순대왕장지''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 총융사를 지낸 김중기에게 통고함으로써 재확인됐다.

이번에 발견된 문헌들에는 이같은 사실과 함께 당시 이 능의 위치를
놓고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도리기자체가 실측과는 오차가
많고 무덤주위에 곡장과 해자가 있었던 점, ''산위에 순릉이 있는데
이는 경순왕의 무덤''이라는 말이 전해져왔다는 현지인들의 증언등을
종합분석한 결과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문헌에는 전동지중추부사 김응호가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과 1747년
(영조23년) 영조의 명에 따라 능묘를 다듬고 비석을 새로 세운뒤 장단부사
심봉징이 올린 제사의 제문내용도 포함돼 있다.

또 매년 제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과 제수비용등을 기록한 계첩,
의성김씨후손 김중구와 김시준등의 문집도 발견됐다.

현재의 비석은 영조때 세운 것으로 앞면과 옆에 10여개의 총탄흔적이
있다.

다행히 뒷면의 비문은 훼손되지 않아 경순왕이 고려경종3년(978년)
4월4일 죽은뒤 이곳에 묻혔다고 새겨져 있다.

최초의 능비는 75년 이 능이 사적 224호로 지정된 후 능역정화작업중
발견돼 별도비각안에 세워져 있는데 심하게 마모돼 몇자밖에 남아있지
않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나라를 고려에 넘겨줘야 했던
비운의 역사를 반영하듯 유일하게 신라경계 밖에 있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과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지석이
중국남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일로 미뤄볼 때 망국의 왕가는 제나라에
묻힐 수도 없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 문헌을 검토한 이기동교수(동국대 사학과)는 "금석총람에 수록된
경주의 신라경순왕전비에는 1748년(영조24년)장단에서 지석일 발견
됐다는 내용만 간략하게 실려있는데 이 문헌은 그보다 훨씬 앞서
지석이 발견됐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이문헌이 당시의 예문과 지리등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어 고/중세사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신라김씨연합대종원(총재 김진석)은 7일 이곳에서
"경순대왕춘형대제"를 지내고 왕릉주변의 성역화작업을 본격
추진키로 했다.

이날 대제에는 김광일 국민고충처리위원장 김진우 헌법재판소재판관
김태수 전농림수산부차관등 1,000여명의 문중인사들이 참석했다.

< 고두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