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공때 정보당국은 어렵사리 입수한 한장의 사진자료를 청와대에 긴급
전달했다.

그 사진엔 북한의 흥남비료공장이 담겨있었다.

6.25때 미군 폭격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공장이 말끔하게 복구된
모습으로.

청와대의 지시로 상공부(당시)는 즉각 사진자료 분석작업에 착수했다.

분석 포인트는 완벽하게 재현돼 있는 기계설비였다.

"아무리 뜯어봐도 암모니아 컴프레서등 핵심 기계설비가 완벽하게 재설치
돼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건물이야 설계도면만 있으며 복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기계까지 완전
복구한 데야 기가 찰 노릇이었다.

기계 제작능력에서 북한이 한국보다 몇수나 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원철전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담이다.

정부엔 즉각 비상이 걸렸다.

당시 모색되고 있던 "중화학입국"의 결단을 더욱 앞당겨야 한다는 "각성"
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의 기계산업이래봐야 구일본총독부로부터 접수한 조선기계제작소
(대우중공업 전신)와 관동기계제작소(기아기공 전신)가 광산용기계와 압연품
등 철구조물을 조립해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60년대 들어 현대양행(한국중공업 전신)이 설립되면서 중장비를 제대로
찍어내는 단계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산업은 섬유 비료
화학등에 밀려 한국 제조업분야에선 가장 낙후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자본재산업이 오늘의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73년 경남 창원에
대규모 기계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로 봐야한다(김순기계공업진흥회
부회장).

그나마도 초기엔 섬유직기등 경공업용 산업기계가 주종을 이뤘다.

남북대치관계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후의 기계공업 본격 발전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됐다.

70년대 정부가 내건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방산용 기계의 국산화가 적극
추진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전후한 71-77년까지의 7년동안 국내 기계공업이 무려 10배나
성장하는 경이적인 도약을 보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덕분에 국내 기계산업은 현재 CNC(컴퓨터수치제어)등 초정밀분야의
공작기계를 비롯해 건설기계 농기계등 대부분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의
생산대국에 오르게 됐다.

자동차 조선등 세계 선두를 넘보는 수송기계는 말할 것도 없고.지난
93년 처음 2백억달러를 돌파(2백13억달러)한 기계업계의 수출규모는 올핸
2백88억6천만달러로 3백억달러에 육박할 것(김동철통상산업부 산업기계과장)
으로 기대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국내 기계산업의 상전벽해는 저변을 이루는 기업숫자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80년 5천5백45개업체로 전체 제조기업의 18%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93년말 현재로는 물경 2만3천9백17개사로 10년남짓새 4배이상이 늘어났다.

전체 제조업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1.1%로 껑충 뛰어올랐다.

여기에 "자주국방"에서 "자본재 국산화자립"으로 확산된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집중되면서 잇단 기술개발 개가를 올리고 있다.

86년이후 작년말까지 국산화된 자본재는 공작기계류를 비롯해 공기압축기
발전기 자동밸브등 4천2백2개에 이르고 있다.

과연 한국의 기계류등 자본재산업이 밝아졌다고 볼 수 있을까.

여전히 어둡고 개선돼야 할 측면을 더 많이 감추고있는 "산업계의 야누스"
란 지적을 듣고 있는게 현실이다.

단적으로 무역적자의 대부분이 이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예컨대 일반기계만 하더라도 지난해 무역수지가 무려 1백35억달러로 전체
적자(63억3천5백만달러)를 두배이상 웃돌았다.

자본재산업이 "적자 한국의 주범"이란 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산업의 뿌리를 이루는 전문 중소기업들이 취약한 상태에서 조립을 주로
하는 대기업위주의 불안한 산업구조를 유지해온 탓이다(송기재산업연구원
연구위원).

중소기업의 전문.계열화가 미흡하다보니 대부분의 핵심 부품과 기자재를
일본등 외국에서 들여다 대충 조립하는 단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자성은 업계 내부에서조차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기계를 만드는 기계라는 공작기계에서 핵심부품인 컨트롤러를 여태껏
자체 개발하지 못한채 전량을 일본등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는 제품의 원가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최종제품의
경쟁력도 취약해지는 건 당연하다"(김재복기아기공 사장).

애써 개발했다는 국산 자본재가 국내 수요업체로부터조차 외면당하고
있는건 "경쟁력 함수"로 보면 어쩔 수 없는 현상일 수도 있다.

일본 독일 스위스 대만등 기계부문에서 짭짤한 흑자를 누리고 있는
외국업계들이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수직.수평적인 발전을 통해 자기완결형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데서 교훈을 얻어야 할 때다.

"흥남공장"에서 얻었던 자극을 이제는 일본 오사카나 대만의 기계공업
단지에서라도 새롭게 느껴야 한다는 얘기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