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 .. '영화 전태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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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벼운 포르노그라피를 내세운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가
우리사회에 몰고온 문화충격은 결코 작지않다.
화제를 몰고온 주인공이 바로 영화사 기획시대다.
93년 설립된 이 회사는2년남짓한 기간동안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등을 연이어 선보여 영화계
에서는 이미 무서운 아이로 부상한 집단.
그 돌풍의 핵심인 기획시대 유인택(40)대표를 어렵사리 종로구 원서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근 "영화 전태일"의 영상화작업을 진행하면서 또한번 주목을 끌고있는
그는 26일 제작발표회를 앞두고 말그대로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여사가 지난해 박광수감독과 저에게 직접
''영화전태일; 제작을 부탁해왔다"며 영화제작 동기에 대해 운을 뗀
그는 "우선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념이 진하게 배어있는 사회운동 차원의 영화가 아니라 순수한 영화적
시각에서 청년 전태일을 다뤄 "쉰들러리스트"같은 작품을 만들 계획.
15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이 영화는 7월까지 촬영을 끝내고 후반부
작업은 호주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흑백과 컬러가 공존하는 필름 현상을 보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라는 설명.
민주당 유인태의원의 실제인 그가 83년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전공과 관련없는 분야인 영화판에 뛰어든 것은 7.80년대의 시대상황과
무관치않다.
"75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던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숨막히는 현실에서 돌파구로서 찾은 곳이 연극반활동이었고 이것이
이후 재야문화활동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연극 탈춤 마당극 등의 문화운동 기획자로서 활동하던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은 80년대 후반.
영화기획자로서 "모드가코리아" "판영화사" "신씨네"등에서 배우는
과정을 거친후 독립했다.
이전의 사회운동경력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제작이 어울리는 않는
것 같다는 질문에
"영상.영화산업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산업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다른 것을 고려될수 없습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는 메시지가 됐건 재미가 됐건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포르노성이 가미된 비디오 "삐삐러브"도 제작중이다.
"작품의 수준을 높이고자 애썼습니다.
전체 비디오시장의 40%정도가 흔히 ''블루마켓''이라 불리는 16mm
비디오물로 점유되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또 영화시장을 세계로 넓히는 차원에서 할리우드식 영화제작도
추진하고 있다.
"자본과 시나리오,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할리우드에서 직접
조달, 제작할 생각"이라는 그는 우리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는
앞서가는 영화인의 한명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2일자).
우리사회에 몰고온 문화충격은 결코 작지않다.
화제를 몰고온 주인공이 바로 영화사 기획시대다.
93년 설립된 이 회사는2년남짓한 기간동안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등을 연이어 선보여 영화계
에서는 이미 무서운 아이로 부상한 집단.
그 돌풍의 핵심인 기획시대 유인택(40)대표를 어렵사리 종로구 원서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근 "영화 전태일"의 영상화작업을 진행하면서 또한번 주목을 끌고있는
그는 26일 제작발표회를 앞두고 말그대로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전태일의 어머니인 이소선여사가 지난해 박광수감독과 저에게 직접
''영화전태일; 제작을 부탁해왔다"며 영화제작 동기에 대해 운을 뗀
그는 "우선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념이 진하게 배어있는 사회운동 차원의 영화가 아니라 순수한 영화적
시각에서 청년 전태일을 다뤄 "쉰들러리스트"같은 작품을 만들 계획.
15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이 영화는 7월까지 촬영을 끝내고 후반부
작업은 호주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흑백과 컬러가 공존하는 필름 현상을 보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라는 설명.
민주당 유인태의원의 실제인 그가 83년 서울대 약대를 졸업한 후
전공과 관련없는 분야인 영화판에 뛰어든 것은 7.80년대의 시대상황과
무관치않다.
"75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던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숨막히는 현실에서 돌파구로서 찾은 곳이 연극반활동이었고 이것이
이후 재야문화활동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연극 탈춤 마당극 등의 문화운동 기획자로서 활동하던 그에게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은 80년대 후반.
영화기획자로서 "모드가코리아" "판영화사" "신씨네"등에서 배우는
과정을 거친후 독립했다.
이전의 사회운동경력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 제작이 어울리는 않는
것 같다는 질문에
"영상.영화산업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산업의 존립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다른 것을 고려될수 없습니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는 메시지가 됐건 재미가 됐건 관객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포르노성이 가미된 비디오 "삐삐러브"도 제작중이다.
"작품의 수준을 높이고자 애썼습니다.
전체 비디오시장의 40%정도가 흔히 ''블루마켓''이라 불리는 16mm
비디오물로 점유되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또 영화시장을 세계로 넓히는 차원에서 할리우드식 영화제작도
추진하고 있다.
"자본과 시나리오,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할리우드에서 직접
조달, 제작할 생각"이라는 그는 우리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는
앞서가는 영화인의 한명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