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은 그동안 우촌을 돕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우촌형이 어려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우촌형이 부탁도 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돕겠다고 나서면 실례가 되는것 같아 꾹 참고 있었지요.

내가 넉넉한 편이 못되어 크게 도와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장안까지 가는 여비 정도는 마련해 줄 수가 있소"

사은의 말을 듣고 있던 우촌이 너무도 감격하여 그 부리부리한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은혜랄 것까지도 없지만, 우촌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오르고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소.

내가 마련해주는 여비를 가지고 곧장 장안으로 떠나시오.

내년이 마침 대비의 해이니 지금 장안에 올라가서 준비하고 있다가
내년 봄에 치르는 대비에 응시하면 우촌형이 오랫동안 닦아온 학문이
크게 결실을 얻을 것이오"

우촌이 약간 놀라운 기색으로 사은을 새삼 쳐다보며 물었다.

"진선생은 과거시험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내년이 대비의 해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허허. 그것도 다 우촌형 때문이지요.

저 사람이 과거시험을 볼텐데 하고 관심을 좀 가졌던 거죠.

삼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대비시험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삼년을
기다려야 하지않소"

사은은 말이 나온 김에 하인을 불러 돈 오십냥과 겨울옷 두 벌을
가지고 오게 하여 우촌에게 건네주었다.

우촌은 그날 새벽에 호로묘로 돌아오자 마자 절간 주지에게 작별을
고하고 장안으로 떠났다.

해가 바뀌어 정월 대보름이 되었다.

곽계라는 하인이 사은의 딸 영련을 안고 대보름 등불놀이 구경을
나갔다.

술도 좀 마시며 한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오줌이 마려워 영련을
어느집 대문앞에 내려놓고 그 집 담 뒤로 돌아가 소피를 보았다.

그런데 오줌을 다 누고 바지춤을 올리며 다시 대문께로 와보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영련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세살밖에 되지 않아 혼자 걸음마를 해서 멀리 갔을 리도 없는데, 곽계가
그 집을 비롯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영련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등불을 든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강물처럼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밤새껏 영련을 찾아 헤매던 곽계는 주인에게 죽을 죄를 지은 것을
알고는 주인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길로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