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임금교섭이 시작된 단위사업장에서 속속 반가운 소식이 날아
들고 있다.

삼성전자가 국내 10대그룹의 주력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노사간 협상도
생략한채 5.6%의 임금인상에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11일에는 30대그룹 내에서는 처음으로 동국제강 노사가 역시 무교섭
으로 4.8% 임금인상에 합의한 바있어 노사협력 분위기가 대기업 사업장을
중심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 대기업의 임금인상결정 과정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5.6~8.6%) 가운데 최저선이나 그 이하를, 그것도 무교섭으로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동국제강노조나 삼성전자의 노조격인 "한가족협의회"가 회사측에
인상폭을 백지위임해 회사가 제시하는 인상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과거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임금교섭이라고 하면 으레 2~3개월씩 밀고 당기고 하는 소모전을 치른
끝에 노사가 모두 지친 상태에서 타협에 이르게 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던 것이 단 한차례의 교섭도 거치지 않고 근로자측이 회사측의 인상안
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회사에 대한 어지간한 신뢰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같은 무교섭 임금타결이 사용자측의 성실한 자세를 바탕으로
하여 노사간의 신뢰가 두텁게 쌓인 결과라고 평가한다.

또 이들 사업장 근로자들이 정부가이드라인의 하한선을 자진해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이변이라면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삼성전자와 같이올들어 1.4분기 동안만도 5,000억원의 이익을
낸 화사에서 근로자들이 호황에 따른 분배욕구를 자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다.

이는 노사 모두가 엔고의 호기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성장주의적 소득분배
전략"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노사가 소모전을 벌이기 보다는 미래를 선취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는
정신이다.

특히 회사의 국제경쟁력과 정부의 경기진정책을 감안했다는 근로자측의
설명은 국민 모두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처럼 몇몇 대기업에서 뚜렷한 노사화합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올해 산업현장의 전반적인 노사관계는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노조측이 터무니없이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해 진통을 겪고 있는 사업장도
적지 않다.

경영성과와 근로조건이 삼성전자와 같지 못한 다른 많은 사업장의
근로자들에게는 무교섭.저율의 임금타결이 "부잣집에서나 나올수 있는
인심"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삼성의 노사협력을 부러워하기에 앞서 사용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먼저 근로자들의 신뢰를 끌어내는 일에 발벗고 나서야 한다.

우리경제를 이만큼 키워온 원동력이 노사협력이었듯이 앞으로 무한경쟁시대
를 헤쳐나갈 힘도 노사화합에서 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이제 근로자도 사용자와 함께 회사의 앞날을 설계하는 경영파트너라는
새로운 인식이 삼성전자의 임금타결을 계기로 전 산업장에 확산되길 기대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