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이 시를 해석하는 솜씨가 기특하여 보옥은 그녀가 사랑스럽기
까지 하였다.

시녀로 있기에는 아까운 계집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런 계집이라면 경환 선녀가 꿈속에서 가르쳐주어 가경과 함께
펼쳐본 그 운우지사의 비법을 실습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충분히
될만 하였다.

하긴 바로 그것을 위하여 지금 습인을 우선 만져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너의 해석이 그럴듯하구나.

하지만 내 평생에 그 계자 이름을 가진 여자와 연자 이름을 가진
여자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사람의 인연이란 묘하고 묘한것. 언제 어디서 그 여자들을 만날지
모르지요"

"하긴 그래. 내가 설보채와 임대옥을 이 금릉땅에서 만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부책 다음으로 보신 책이 정책이겠군요.

그 정책에 금릉성에서 여러 모로 빼어난 여자 열두명의 운명이 기록
되어 있다고 했으니, 보채 아씨와 대옥 아씨의 운명도 기록되어 있고
원춘, 탐춘 아씨들의 운명도 기록되어 있겠네요"

원춘, 탐춘은 각각 보옥의 친누나, 배다른 누나로 출중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박명사에는 박명한 여자들의 운명만 기록되어 있으니 보채나
대옥이, 우리 누나들은 그 명단에서 빠져 있을 수도 있지.

근데 옥띠가 숲속에 걸려 있고 금비녀가 눈속에 묻혀 있는 그림같은
것은 임대옥과 설보채 이름과 상관이 있는 듯이 여겨지기도 한단
말이야"

"그렇군요. 임이 수풀을 뜻하고 설은 설과 발음이 같고 채는 비녀
이니까 말이죠. 그래 그 열두명의 운명 장부를 다 읽으셨어요?"

습인은 박명한 운명으로나마 정책 명부에 끼여있는 그 여자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아무리 그 여자들이 박명하다 하더라도 일단은 부귀영화를 누리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부책에 기록된 습인과 같은 시녀들의 박명은 처음에도 박명이요,
나중에도 박명인 셈이었다.

"그렇지. 정책은 빼놓지 않고 다 읽었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식구들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어떤 책장에는 궁궐같은 집의 대들보에 목을 맨 여자가 그려져 있는
끔찍한 그림도 있었지"

보옥은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진저리를 쳤다.

"그 그림의 시구절은 어떤 것이었어요?"

습인 역시 두려움에 젖은 표정이었지만 무슨 단서라도 잡을까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하늘과 바다에 사무치는 정욕의 몸들, 한번 정을 주고 받기만 하면
반드시 음탕해지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