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해정천이면 그게 무슨 뜻이죠?" 습인은 가빠오는 숨을 뱉어내기
위해서도 틈있는 대로 입을 열어 질문을 해야만 하였다.

"얼자는 요물이라는 뜻도 있고 첩의 자식이라는 뜻도 있지. 그리고
화려하게 꾸민다는 뜻도 있고.얼해라고 하면 못다한 사랑의 바다,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대련 구절에도 그런 의미가 들어 있거든"

"어떤 구절들이었는데요?"

"고금에 걸친 남녀의 애정 하늘과 땅에 사무쳐 다할 날이 없고,치정에
얽힌 남녀의 가련하고 어지러운 사연 풀 길이 없구나. 이런 구절이었는데
그것을 읽는 순간,뭔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찡하니 아파오는 거야.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남녀가 나누어온 사랑의 양과 크기와 부피가 얼마나
될까,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더 크지 않을까,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그리고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태웠던 사연들이 또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하니 내가 막 안타까워지는 거야"

"왜 도련님이 안타까워져요?" 보옥이 습인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기
때문에 습인이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찔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물은 것은 보옥이 보채와 대옥 사이에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실을 습인이 눈치를 채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습인이 보기에,보옥이 보채보다 대옥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대옥은
좀 차갑고 거만한 구석이 있어 보옥이 혼자서 마음 고생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면 보옥은 보채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져 사근사근하고 명랑한
보채를 통하여 얼마간 위로를 받기도 하겠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옥이나 보채,대옥들이 아직 어린 나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치정관계니 삼각관계니 하는 말들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었다.

"나도 내가 왜 안타까워졌는지 모르겠어.그 대련 구절이 바로 나를
두고 쓰여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아무튼 나는 그 구절을
읽는 순간,남녀의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었지"

"그래 그 소원대로 되셨군요"

"그런데 경환 선녀는 그걸 당장에 가르쳐주지는 않았어.나를 온갖 곳으로
다 데리고 다니며 참으로 많은 것을 구경시켜주고 나서야 가르쳐주었지"

"어떤 것을 구경했는데요?"

습인이 이제는 보옥의 애무로 인한 쾌감에 몸이 흐늘흐늘 녹아 아예
상체를 보옥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