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산업] (3) 반도체 세계제일 굳힌다 <3>..'독칠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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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년만에 서울 하늘에 휘날린 구한말 태극기"
작년 9월 삼성전자가 주요 일간지에 게재한 광고를 조금 과장하면 이렇다.
이 회사가 일본기업들 보다 세계 최초로 2백56메가D램을 개발한 직후의
일이다.
삼성은 광고면에 구한말 태극기를 커다랗게 내걸었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한 세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자는건 아니었다.
세계 최첨단을 걷는다는 반도체 산업에서 마침내 "극일"의 신기원을 이룩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 관한 한 한일관계는 합방이전의 대등한 상태로 "원상회복"
됐음을 나라 안팎에 공포한 것이다.
삼성전자, 아니 한국 반도체 업계로선 "기술극일"이 던져주는 의미가
각별했다.
비슷한 시기에 뒤따른 황영조의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극일에
견줄바가 아니었다.
황무지에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지난 10여년간 겪어야 했던 온갖 설움을
돌이킬라치면 더욱 그렇다.
사실 삼성을 비롯한 국내 반도체 업계의 발전과정은 장애물 경주와 같았다.
절벽을 기어올라가면 강물이 나왔고, 강을 건너면 낭떠러지였다.
기술없는 서러움은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83년 삼성은 본격적인 D램 산업 진출을 결정하고는 일본에 "반도체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그것도 당시 일본 2류 반도체업체인 샤프사에.
삼성의 박사급 연구원들은 여기서는 한갖 기술연수생에 불과했다.
그것도 일본 고졸 엔지니어들을 "사수"로 모셔야 하는 처지였다.
샤프신사유람단 단장격이었던 이윤우 삼성전자 반도체부문대표이사(당시
개발실장)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생산공정이나마 어깨너머로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구박을
받아가며 엔지니어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 돌아왔지요"라고.
삼성의 사프 파견팀은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삼성은 이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83년말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본 기술을 모방한 결과일뿐이다.
이를 악물고 일본추격에 나선지 꼭 11년만인 지난해 2백56메가D램을 먼저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일본 추월의 신화를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다.
기술없는 자의 설움은 꼭 일본업체들에게서만 당한 것만도 아니다.
지난 86년 2월 미국 텍사스인스투르먼츠(TI)사가 삼성을 특허침해 혐의로
제소했을 때도 상황은 엇비슷했다.
일본업체들도 똑같이 제소를 당했지만 자신들이갖고 있는 기술을 이용해
특허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특허를 상호 공유하는 크로스 라이선스(cross liscence)가 카드였다.
하지만 삼성은 이럴 기술이 없었다.
결국 7백20억원을 지불했다.
남들은 기술로 해결하는데 돈으로 떼워야 했던 것.
그러나 이 참담한 경험은 오늘의 기술을 확보하는 에너지가 됐다.
한국반도체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허들"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무기술"이라는 절벽에 더해졌던 것은 "덤핑공세"라는 낭떠러지.
제아무리 우수한 상품을 생산해도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일본은 이같은 점을 노려 덤핑공세에 나섰다.
일본의 덤핑공세로 지난 85년 7월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주력상품인 64KD램
국제가격이 폭락했다.
개당 3달러50센트씩 하던 가격이 3개월만에 50센트까지 떨어진 것.
일본업체들은 미국시장 석권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국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64KD램 개당 제조원가는 1달러70센트였습니다. 그런데 판매가격은
50센트였어요"
삼성전자 김광호부회장은 이때를 악몽이라고 표현한다.
다행히 미국의 덤핑제소로 일본의 덤핑공세가 연말부터 중단됐다.
삼성으로 보면 하늘이 도운 셈이다.
삼성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기술극일"의 필요성을 더더욱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실이 "세계 최초"의 2백56메가D램 개발로 이어진 셈이다.
흔히 반도체는 "운칠기삼"의 산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가변적 요소가 많다.
시장상황은 언제나 불안하고, 중간상들의 장난도 끼어들기 쉽상이다.
이래서 운이 70%는 따라줘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산업은 "독"이 70%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미국보다는 약 30년, 일본보다는 20여년 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면서
도 세계정상에 올라선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운칠기삼"이 아닌 "독칠기삼"으로 성장 발전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직 자만할 단계는 아니다.
삼성이 올해초 64메가D램 3세대(동급 메모리의 세대는 칩사이즈 축소로
결정된다)제품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을 때 나온 일본 NEC의 코멘트는 "삼성은
이제 우리 기술수준의 현관 앞 정도에 왔다"였다.
2백56메가D램에서는 한국에 선수를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 수 아래
라는 "의도적 평가절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 업체들은 최근 1기가D램 프로토타입(설계완료수준)을
한국보다 한 발 먼저 개발했다며 대대적으로 광고공세를 폈다.
"재역전"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이다.
기술극일은 아직도 "미완의 대장정"이라고 해야할 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5일자).
작년 9월 삼성전자가 주요 일간지에 게재한 광고를 조금 과장하면 이렇다.
이 회사가 일본기업들 보다 세계 최초로 2백56메가D램을 개발한 직후의
일이다.
삼성은 광고면에 구한말 태극기를 커다랗게 내걸었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한 세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자는건 아니었다.
세계 최첨단을 걷는다는 반도체 산업에서 마침내 "극일"의 신기원을 이룩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 관한 한 한일관계는 합방이전의 대등한 상태로 "원상회복"
됐음을 나라 안팎에 공포한 것이다.
삼성전자, 아니 한국 반도체 업계로선 "기술극일"이 던져주는 의미가
각별했다.
비슷한 시기에 뒤따른 황영조의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 극일에
견줄바가 아니었다.
황무지에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지난 10여년간 겪어야 했던 온갖 설움을
돌이킬라치면 더욱 그렇다.
사실 삼성을 비롯한 국내 반도체 업계의 발전과정은 장애물 경주와 같았다.
절벽을 기어올라가면 강물이 나왔고, 강을 건너면 낭떠러지였다.
기술없는 서러움은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83년 삼성은 본격적인 D램 산업 진출을 결정하고는 일본에 "반도체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그것도 당시 일본 2류 반도체업체인 샤프사에.
삼성의 박사급 연구원들은 여기서는 한갖 기술연수생에 불과했다.
그것도 일본 고졸 엔지니어들을 "사수"로 모셔야 하는 처지였다.
샤프신사유람단 단장격이었던 이윤우 삼성전자 반도체부문대표이사(당시
개발실장)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생산공정이나마 어깨너머로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구박을
받아가며 엔지니어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 돌아왔지요"라고.
삼성의 사프 파견팀은 별다른 소득없이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삼성은 이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83년말 64KD램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본 기술을 모방한 결과일뿐이다.
이를 악물고 일본추격에 나선지 꼭 11년만인 지난해 2백56메가D램을 먼저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일본 추월의 신화를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다.
기술없는 자의 설움은 꼭 일본업체들에게서만 당한 것만도 아니다.
지난 86년 2월 미국 텍사스인스투르먼츠(TI)사가 삼성을 특허침해 혐의로
제소했을 때도 상황은 엇비슷했다.
일본업체들도 똑같이 제소를 당했지만 자신들이갖고 있는 기술을 이용해
특허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특허를 상호 공유하는 크로스 라이선스(cross liscence)가 카드였다.
하지만 삼성은 이럴 기술이 없었다.
결국 7백20억원을 지불했다.
남들은 기술로 해결하는데 돈으로 떼워야 했던 것.
그러나 이 참담한 경험은 오늘의 기술을 확보하는 에너지가 됐다.
한국반도체산업 발전을 가로막는 "허들"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무기술"이라는 절벽에 더해졌던 것은 "덤핑공세"라는 낭떠러지.
제아무리 우수한 상품을 생산해도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일본은 이같은 점을 노려 덤핑공세에 나섰다.
일본의 덤핑공세로 지난 85년 7월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주력상품인 64KD램
국제가격이 폭락했다.
개당 3달러50센트씩 하던 가격이 3개월만에 50센트까지 떨어진 것.
일본업체들은 미국시장 석권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국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당시 64KD램 개당 제조원가는 1달러70센트였습니다. 그런데 판매가격은
50센트였어요"
삼성전자 김광호부회장은 이때를 악몽이라고 표현한다.
다행히 미국의 덤핑제소로 일본의 덤핑공세가 연말부터 중단됐다.
삼성으로 보면 하늘이 도운 셈이다.
삼성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기술극일"의 필요성을 더더욱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실이 "세계 최초"의 2백56메가D램 개발로 이어진 셈이다.
흔히 반도체는 "운칠기삼"의 산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가변적 요소가 많다.
시장상황은 언제나 불안하고, 중간상들의 장난도 끼어들기 쉽상이다.
이래서 운이 70%는 따라줘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산업은 "독"이 70%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미국보다는 약 30년, 일본보다는 20여년 늦게 뛰어든 후발주자면서
도 세계정상에 올라선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운칠기삼"이 아닌 "독칠기삼"으로 성장 발전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직 자만할 단계는 아니다.
삼성이 올해초 64메가D램 3세대(동급 메모리의 세대는 칩사이즈 축소로
결정된다)제품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을 때 나온 일본 NEC의 코멘트는 "삼성은
이제 우리 기술수준의 현관 앞 정도에 왔다"였다.
2백56메가D램에서는 한국에 선수를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 수 아래
라는 "의도적 평가절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본 업체들은 최근 1기가D램 프로토타입(설계완료수준)을
한국보다 한 발 먼저 개발했다며 대대적으로 광고공세를 폈다.
"재역전"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이다.
기술극일은 아직도 "미완의 대장정"이라고 해야할 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