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대신에 필기수단으로 사용되는 타자기가 개발되기까지에는 다른
발명품들 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찌기 1714년 영국인 헨리 밀이 타자기를 발명하여 앤여왕으로부터
특허권을 따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것이 실제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다.

그뒤 51명에 이르는 발명가들의 손을 거쳐 1873년에야 이전까지와는 달리
조작이 간편하고 펜으로 쓰는 속도보다 빠른 세계 최초의 실용적인 타자기가
나오게 되었다.

미국의 발명가 크리스토퍼 솔스가 50여가지의 각종 모델을 시험한 뒤
만들어낸 타자기의 특허권을 총포와 재봉틀 제조업체였던 레밍턴사에서
사들여 상품화했던 것이다.

줄바꾸개가 페달식으로 되어 있어 재봉특 모양이었던 당시의 레밍턴
타자기는 기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점들이 많았다.

그뒤 줄바꾸개가 레버식으로 부뀌고 알파벳순의 키 배열을 자주 사용되는
글자의 중앙배열로 고치는등 꾸준한 개선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타자기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이 새로운 기계를 재빨리 수용하질 못했다.

마침내 1881년 뉴욕시 YWCA가 여성직업교육의 일환으로 타자교습과정을
마련해 타자기의 대중화에 선도역할을 해냈다.

직장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던 여성들이 고임 금의 사무직 진출을 약속해
주는 타자교습에 수없이 몰려 들었다.

그 결과 1880년대중반에는 6만명의 여성타자수들이 사무실의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한국의 타자기 역사는 1914년 재미교포인 이지익이 영문타자기에 한글활자
를 바꿔 끼어 만든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타자기는 세로로 읽게 찍히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사람의 고안을 거쳐 50년 한국최초의 안과전문의 였던
공병우가 한국과 미국의 발명특허를 받아 언더우드타자기회사에서 가로찍기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제작 상품화한 것이 실용화의 원조가 되었다.

6.25전쟁중이던 1952년 해군이 공병우식 한글타자기로 군항정사무의
기계화를 실행한 뒤를 이어 육.공군, 정부, 민간기업, 실업교육이 이에
속속 동참한 것이 타자기 대중화의 기틀이 되었다.

그 뒤로 개발된 김동훈식 글자판이나 표준자판, 외솔 글자판 역시
공병우식이 디딤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밖에 한.영겸용 타자기, 한글텔레타이프, 검자 한글타자기, 맹인용
한글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는등 평생을 한글기계화운동에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공병우박사의 공적은 한국타자기역사와 더블어 길이 기억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