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그룹의 한농인수를 계기로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문제가 주총시즌
최대관심사로 부상하고있다.

의결권 행사 범위와 자산운용에 관한 도덕적 규범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있다.

(주)한농이 동부그룹에 인수되는 과정에서 증안기금등 일부 기관투자가들이
위임장을 써준것이 모두 동부쪽에 가산되면서 경영권 장악에 들러리를
섰다는 것이 문제 제기의 배경이다.

증권감독원이 동부그룹측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증안기금 보유주식
2만3천40주(1.33%)등 상당수의 기관투자가 보유주식이 주총에서
동부측에 찬성표로 계산됐다.

기관투자가가 경영권을 다투는 세력사이에서 결과적으로 특정세력의
지원역할을 하게된 이번 사례는 주총효력에 관한 사법적 판단여부와는
별도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와 관련한 몇가지 검토되어야 할 문제를
부각시키고있다.

우선 현재와 같은 위임장 교부방식이 더이상 타당하지 않게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기관투자가들은 "주총을 성립시키기 위해" 회사측의 요구에따라
일종의 백지위임장을 발부해왔다.

증권감독원은 이같은 형식의 위임장은 주총 안건을 명시해서 위임토록한
증권거래법 1백99조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밝히고있다.

거래법은 의결권을 위임할 경우 구체적인 부의안건에 대해 찬반을
표시한 위임장을 제시하도록하고있어 이번 한농주총에서 위임행사된
주식의 효력여부가 도마에 올라있다.

그동안 관례적으로 해오던 일이지만 이번일을 계기로 이같은 위임장은
더이상 발부할수 없음이 명확해지고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산운용의
도덕성 그자체에도 있다.

현행 증권거래법이나 상법 어디에도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범위에
대한 규정은 없다.

기관투자가들의 의결권 행사가 주식의 가치를 방어하는 목적에 제한된
것인지 여부는 현재까지는 기관투자가 자신의 판단에만 맡겨져왔다.

지난 93년 삼성생명이 기아자동차 주식을 매집해 문제가 됐던 이후 "30대
그룹계열 금융기관은 특정회사 발행주식의 5%를 초과해 주식을 보유할 수
없다"고 규정한 새로운 운용지침이 나왔을 뿐 의결권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은 아직 없다.

이번에 특정금전 신탁이 편법적인 M&A 수단으로 이용된 것 처럼 특정
기업그룹이 계열기관투자가를 이용해 다른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막을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현재로서는 없다.

예를들어 삼성생명이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기아자동차
주식을 자전거래를 통해 계열사로 넘기고 계열사에서 의결권을 행사하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기아자동차를 인수할수 있게 되어있다.

기관투자가들은 위탁자산의 운용을 위해 주식을 보유하는 만큼 의결권
행사도 목적에 제한된 것이어야 하겠지만 합목적성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명시적인 기준은 없다.

증권회사에 대해 투신업무가 주어지는등 증시에서의 기관화현상이
진전될 수록 기관투자가를 낀 편법적인 주식거래와 탈법적인 의결권
행사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증권당국은 투자신탁 보험회사 은행등 기관투자가의 자산운용과 의결권
행사범위에 대해 보다 명시적인 규정을 만들어둘 필요성이 있다.

< 정규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