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옹"은 여러장의 수채화를 겹쳐놓은 것같은 작품이다.

첫장을 들추면 대서양의 물빛과 푸른숲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뉴욕의
빌딩가가 원경으로 나타난다.

다음장을 넘기면 뉴욕의 뒷골목 한켠에 앉아있는 레옹(장 레노)의
커다란 눈동자가 화폭 가득 채워진다.

그 눈동자 속으로 겹쳐지는 빈민가 풍경과 마약범죄 그리고 냉혹한
킬러의 모습. 주인공 레옹은 일말의 틈새도 보이지 않는 "청소도구"다.

언제나 말없이 혼자 있는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란 찾아볼 수 없다.

문맹인 그에게 은행구좌나 신분증이 있을 리 없다.

그가 가진것은 권총과 검은 안경. 그리고 화분 하나.

푸른색 베고니아화분은 언제나 그의 배경에 정물화로 놓여있다.

영혼마저 어딘가 앗긴 것같던 레옹.그러나 12살짜리 소녀 마틸다
(나탈리 포트만)를 만나면서 레옹은 혼란에 빠진다.

아버지와 마약거래를 일삼던 경찰 스탠필드(게리 올드만)일당이 식구
들을 살해하자 마틸다는 옆집의 레옹에게 도움을 청하고 복수를 위해
총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다.

스탠필드일당은 마틸다의 뒤를 계속 쫓고 위기에 빠진 둘은 미묘한
사랑을 느낀다.

막연한 희망을 상징하던 베고니아처럼 청순한 그녀가 레옹의 영혼을
일깨운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을 예감한 레옹은 마틸다에게 화분을 주며 떠나
라고 한다.

혼자 가지 않겠다는 그녀에게 레옹은 말한다.

"널 사랑한다. 넌 내인생의 등불이야". 영화가 끝날 때 자막뒤로 보이는
마지막 그림은 첫장에서 본 푸른숲이다.

마틸다가 화분속 베고니아를 땅에 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레옹"은 냉혹한 킬러와 12살짜리 소녀가 그리는 아름다운 수채화다.

"니키타" "그랑블루"등에서 블루톤의 영상미학을 잘 표현해낸 뤽 베송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러나 "슬픈 아름다움"에 가깝다.

영화 전편에 푸른색을 입히던 종래의 연출기법과 달리 여기에선 절제된
초록빛이 주제를 떠받친다.

(18일 명보극장 등 개봉)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