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슈 도노께서 수정을 해 주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사이고는 말했다.

"내정의 개혁과 민권의 신장,특히 사족들의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덧붙이면 어떻겠소?"

"예,그렇게 하지요"

그 무렵,정부에 비판적인 신문들의 논조가 주로 내정의 개혁과 민권의
신장이었다. 막부시대의 봉건적 잔재를 과감히 청산하고, 만민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내정을 개혁하고,민권을 획기적
으로 신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이고가 언론의 그런 비판적인 논조를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민권의 신장 속에 사족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포함시켜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를 타도하고,왕정복고를 이룩한 것은 존황양이파의 사족들인데,그들의
공로를 도외시하고,싸잡아 모조리 생존권마저 박탈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었다.

언론에서 주장하는 민권의 신장은 사족이라는 특권층의 해체를 바탕으로
평민들의 권익을 신장하라는 것이니,어쩌면 정면으로 대립되는 생각을
동일한 개념, 즉 민권신장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보고서에다가 먼저 오야마가 서명했다.

가고시마현의 지사가 중앙정부에 공식적으로 보내는 문서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육군대장인 사이고가 서명했고,이어서 육군소장 기리노와
시노하라가 서명하여 도쿄의 태정관에 송부했다.

그 당시는 현역과 예비역이라는 것이 분명치가 않아서 특히 장군의 경우는
사표를 내고 야인이 되어도 대장은 대장이었고, 소장은 소장이었다.

그래서 사이고는 육군대장 아무개로, 기리노와 시노하라는 육군소장 아무개
아무개로 그 계급을 붙여 서명했던 것이다.

가고시마의 대반군이 도쿄를 향해 출정을 감행한 것은 2월15일이었다.

1877년,그러니까 메이지 연호로는 10년이었다.

3만의 대군이 2천명 단위로 편성된 대대별로 사흘에 걸쳐 출발했는데,
사이고는 사흘째인 17일에 이케 가미시로가 지휘하는 본대와 함께 가교에
몸을 싣고 떠났다.

다른 지휘관들은 모두 말을 탔으나,몸이 너무 비대해서 승마가 불가능한
사이고는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복장은 육군대장의 정장이 아닌 간이복, 즉 전투복에 전투모였고, 허리에
대검을 차고 있었다.

신은 조오리(왜짚신)였다.

사이고가 떠나는 날은 희한하게도 눈발이 휘날렸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