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31일자) 격동과 좌절속에서도 전진있은 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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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무는 해의 끝에 서서 되돌아보면 다사다난하지 않은 해가 있을까마는
지난 갑술년은 유난히도 사건 사고의 생채기가 깊었던 한해였다.
한마디로 "무너진 한해" 였다고나 할까.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는 발전의 상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치욕감과 허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문민정부 원년에 서슬퍼렇던 개혁의 칼날도 단단한 수구세력의
저항에 맥없이 꺾였다.
정치는 민심과 겉돌고 국회의사당은 날치기와 극한 투쟁이라는 소모적
정쟁으로 얼룩졌다.
이렇듯 정치 사회적으로는 문민정부의 통치력이 큰 어려움에 처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제부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해를 되돌아보면서 상처는 컸지만 그래도 전진을 이룩한 한해로
평가할수 있는 것도 모두 경제적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질 경제성장률이 오랜만에 8% 수준을 넘어서고 물가상승률 역시
지수상으로는 5.6%로 잡을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활성화와
수출,기업의 왕성한 설비투자가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같은 성장은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기업의 구조적 체질적인
경쟁력강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해외여건 호전에 크게 힙입은 것이라는
점이 계속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
세계경제는 미국경제가 활성국면에 진입했고 일본 유럽연합(EU)국가들이
회복대열에 동참함에 따라 전년의 1.4%보다 훨씬 높은 2.9%의 성장을
보였다.
여기에 엔화 강세까지 겹쳐 우리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민 모두는 나라전체가
얼마나 큰 병에 걸려 있는지를 새삼 확인한 한 해였다.
민생치안은 실종돼 "지존파"와 같은 살인마들에 의한 납치.살인의 공포가
한낮의 유령처럼 떠돌았다.
또 사회기간시설들이 허무하게 붕괴되는 대형 사고가 잇따라 고속성장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국가 정보통신망을 마비시킨 통신구 화재에다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와
아현동 가스폭발사고등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줄을 이은 대형 사고들은
성수대교 붕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우리의 고속성장이 "속빈 강정"이었음을 뼈아프게 확인시켜준 이
한강다리 붕괴사고는 국제적으로도 "사고왕국"이란 오명을 남기게
했다.
구조적인 비리사건이 꼬리를 물면서 사회를 얼룩지게 했다.
특히 인천북구청의 도세사건은 짐작했던대로 전국적인 세무비리로
비화되면서 국가의 틀을 흔들어놓은 대사건으로 확대됐다.
어려움을 겪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의 제재를 불러올뻔 했던 핵도박과 "살아 있는 신"인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을 탈진케 했다.
김정일 후계체제는 아직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난은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핵협상타결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대내적으로 경협을 통한 체제유지와 대외적으로 국제사회에 새로운
입지를 구축해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극적인 돌파구가 열리는듯 하던
남북관계는 김일성사망으로 정상회담이 무산되고 조문거부를 핑계로
북한의 이른바 "통미봉남" 외교공세가 성공하면서 한치도 진전되지
못한채 해를 넘기게 됐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국지적 분쟁의 지속도 불구하고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신국제질서에 참여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돋보인 한 해였다.
이스라엘이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자치협정을,요르단과는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중동평화의 큰 진전이 이룩됐으며 20세기
유럽의 최장 분쟁지역중 하나였던 북아일랜드 분쟁이 종식됐다.
또 남아공에서는 넬슨 만델라가 342년간 지속돼온 백인통치를 종식시키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돼 흑백 대화합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보스니아 내전도 불안하지만 일단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듯이 보인다.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구소련지역 등에서 아직도 크고 작은 분쟁들이
그칠줄 모르고 있지만 크게 보아 이데올로기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의 물결이 큰 줄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진국의 정치무대에도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일본에서는 전후 55년간 빙탄의 관계였던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정권이
수립됐는가 하면 미국의 중간선거에서는 야당인 공화당이 40년만에
상.하양원을 모두 장악하는 선거혁명을 이룩했다.
이는 정치권에 대한 리엔지니어링 요구가 세계적 조류로 형성돼가고
있음을 보여준 변화들이었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변화의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내세운 국가경영 목표도 문민정부 원년의 "국제화"에서 올해 연말께부터는
"세계화"로 바뀌었다.
연말에 있은 정부조직의 혁명적 축소개편과 대폭적인 개각을 통해
WTO(세계무역기구)출범과 "세계화원년"을 맞을 채비도 갖추었다.
1994년을 마감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짐하는 것은 이제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일로부터 실질적인 세계화의 닻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질과 양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항해는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소명의식에 충일한 "작고 유연한 정부"와 진취적이되 절제를
아는 국민만이 내실있는 세계화를 이룩해낼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31일자).
지난 갑술년은 유난히도 사건 사고의 생채기가 깊었던 한해였다.
한마디로 "무너진 한해" 였다고나 할까.
어처구니 없이 붕괴되는 발전의 상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치욕감과 허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문민정부 원년에 서슬퍼렇던 개혁의 칼날도 단단한 수구세력의
저항에 맥없이 꺾였다.
정치는 민심과 겉돌고 국회의사당은 날치기와 극한 투쟁이라는 소모적
정쟁으로 얼룩졌다.
이렇듯 정치 사회적으로는 문민정부의 통치력이 큰 어려움에 처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경제부문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해를 되돌아보면서 상처는 컸지만 그래도 전진을 이룩한 한해로
평가할수 있는 것도 모두 경제적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질 경제성장률이 오랜만에 8% 수준을 넘어서고 물가상승률 역시
지수상으로는 5.6%로 잡을수 있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의 활성화와
수출,기업의 왕성한 설비투자가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같은 성장은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기업의 구조적 체질적인
경쟁력강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해외여건 호전에 크게 힙입은 것이라는
점이 계속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
세계경제는 미국경제가 활성국면에 진입했고 일본 유럽연합(EU)국가들이
회복대열에 동참함에 따라 전년의 1.4%보다 훨씬 높은 2.9%의 성장을
보였다.
여기에 엔화 강세까지 겹쳐 우리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지탱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민 모두는 나라전체가
얼마나 큰 병에 걸려 있는지를 새삼 확인한 한 해였다.
민생치안은 실종돼 "지존파"와 같은 살인마들에 의한 납치.살인의 공포가
한낮의 유령처럼 떠돌았다.
또 사회기간시설들이 허무하게 붕괴되는 대형 사고가 잇따라 고속성장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국가 정보통신망을 마비시킨 통신구 화재에다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와
아현동 가스폭발사고등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줄을 이은 대형 사고들은
성수대교 붕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우리의 고속성장이 "속빈 강정"이었음을 뼈아프게 확인시켜준 이
한강다리 붕괴사고는 국제적으로도 "사고왕국"이란 오명을 남기게
했다.
구조적인 비리사건이 꼬리를 물면서 사회를 얼룩지게 했다.
특히 인천북구청의 도세사건은 짐작했던대로 전국적인 세무비리로
비화되면서 국가의 틀을 흔들어놓은 대사건으로 확대됐다.
어려움을 겪기는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의 제재를 불러올뻔 했던 핵도박과 "살아 있는 신"인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을 탈진케 했다.
김정일 후계체제는 아직도 자리잡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난은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핵협상타결이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둠으로써
대내적으로 경협을 통한 체제유지와 대외적으로 국제사회에 새로운
입지를 구축해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극적인 돌파구가 열리는듯 하던
남북관계는 김일성사망으로 정상회담이 무산되고 조문거부를 핑계로
북한의 이른바 "통미봉남" 외교공세가 성공하면서 한치도 진전되지
못한채 해를 넘기게 됐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국지적 분쟁의 지속도 불구하고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신국제질서에 참여하려는 각국의 노력이 돋보인 한 해였다.
이스라엘이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자치협정을,요르단과는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중동평화의 큰 진전이 이룩됐으며 20세기
유럽의 최장 분쟁지역중 하나였던 북아일랜드 분쟁이 종식됐다.
또 남아공에서는 넬슨 만델라가 342년간 지속돼온 백인통치를 종식시키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당선돼 흑백 대화합을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보스니아 내전도 불안하지만 일단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듯이 보인다.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구소련지역 등에서 아직도 크고 작은 분쟁들이
그칠줄 모르고 있지만 크게 보아 이데올로기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의 물결이 큰 줄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진국의 정치무대에도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일본에서는 전후 55년간 빙탄의 관계였던 자민당과 사회당의 연립정권이
수립됐는가 하면 미국의 중간선거에서는 야당인 공화당이 40년만에
상.하양원을 모두 장악하는 선거혁명을 이룩했다.
이는 정치권에 대한 리엔지니어링 요구가 세계적 조류로 형성돼가고
있음을 보여준 변화들이었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변화의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내세운 국가경영 목표도 문민정부 원년의 "국제화"에서 올해 연말께부터는
"세계화"로 바뀌었다.
연말에 있은 정부조직의 혁명적 축소개편과 대폭적인 개각을 통해
WTO(세계무역기구)출범과 "세계화원년"을 맞을 채비도 갖추었다.
1994년을 마감하면서 우리 모두가 다짐하는 것은 이제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일로부터 실질적인 세계화의 닻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질과 양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우리의 항해는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소명의식에 충일한 "작고 유연한 정부"와 진취적이되 절제를
아는 국민만이 내실있는 세계화를 이룩해낼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