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중순 한일은행의 김모차장은 이렇게 시작되는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이관우신임행장.
난생 처음 행장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김차장은 적지않이 당황했다.
그러나 행장의 용건은 간단했다.
그날 있을 행사에 관한 질문이 다였다.
이행장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차장외에도 많다.
본점부서의 실무 차장이나 과장들은 물론 지점차장들도 비슷한 전화를
받았다.
이행장이 전화를 이용해 업무처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직원들을 쓸데없이 오라가라하는것은 비생산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뿐만 아니다.
이행장이 외출하고 없을때 행장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결재를 받으러온 직원들이 행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대기하는
폐단을 막아보자는 이유에서다.
은행장경력으로만 따지다면 이제 햇병아리인 이관우행장.
그는 "신세대 은행장"의 모습을 이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
과거 행장들에게서 물씬 풍겨나던 권위나 독선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비단 이행장만이 아니다.
요즘 행장들은 다 그렇다는게 정확하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변화의 바람은 누구에게나 일고 있다.
정지태상업은행장은 자칭 "대리급행장"이다.
직책은 행장이지만 하급직원과 하등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실제가 그렇다.
지난6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오후 갖은 "은행장과의 대화의 장"은
3-4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주)한양등 현안에 대한 은행대책과 경영전반을 행장이 직접 직원들에게
설명하자는게 이 모임의 목적.
따라서 정행장이 말을 많이 해야 했던건 당연했다.
"인사적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새로운 사옥은 언제 완공되는가"등
중구난방식 질문에도 자세한 대답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정행장은 물한모금 마시지 않았다.
"직원들이 물을 마시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장이 마시겠느냐"는게 정행장의
반문이다.
정행장은 이런 식으로 경인지역직원 3천5백명은 물론 영남.호남본부직원들
과 대화의 시간을 마련, 경영진과의 공감을 이뤄냈다.
이철수제일은행장은 틈만 나면 출장소를 찾는다.
지난 23일에는 서울서래출장소를 방문했다.
출장소에서 하는 일이라고해야 특별한건 없다.
그냥 직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게 전부다.
정확히 말하면 애로사항을 듣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인근 설렁탕집에서 점심도 즐겨한다.
이행장이 이런 식으로 방문한 출장소는 줄잡아 30여개.
"모세혈관이 튼튼해야 전체 조직이 건강할수 있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행장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출장소직원들에겐 절로 용기를 북돋우는
"행차"가 아닐수 없다.
시중은행장중에서 제일 고참인 이종연조흥은행장도 새로운 행장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건 마찬가지다.
금융계에 화제가 됐던 "물구나무서기 텔레비전광고"를 만들때도 그랬다.
당시 일부 임원들은 행장이 직접 광고에 출연하는걸 말렸다고 한다.
"체통"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행장은 단호했다.
은행이 변한 모습을 알리기 위해선 행장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래서 광고회사에서 직접 물구나무를 서지 말고 "연출"로 처리하자는
제의도 물리쳤다.
15초짜리 광고를 찍기 위해 3시간이나 거꾸로 서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의 모습은 거의 모든 행장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출근을 아예 영업점으로 하곤하는 손홍균서울신탁은행장이나 융자위원회를
폐지해 대출권한을 하부로 이양한 장명선외환은행장도 그렇다.
예금이 있는 곳이면 언제고 달려가는 이우영중소기업은행장과 영업점장들을
"지역하나은행장"으로 부르는 윤병철하나은행장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은행장상이 변하고 있는데는 여러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객관적인 상황이 과거의 권위주의 은행장을 허락치 않는다.
앉아서 장사하는 시대가 지난것과 비례해 앉아서 자리나 지키는 시절도
흘러갔다.
권위나 독단도 은행내부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
모든 경영지표가 투명화돼 행장이 "눈가리고 아웅"할수도 없게 됐다.
거기다 은행장 자신들의 노력도 변화를 부추기고 있다.
자율인사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만큼 실적이나 직원들로 부터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한 "장수"에 문제가 있다는걸 절감하고 있어서다.
물론 모든 은행장들이 다 그런건 분명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가 "변화"에 있는 만큼 이에 합류하지 못하는 은행장
은 도태될수 밖에 없다.
다가오는 새해에 은행장들은 또 어떤 모습을 그려나갈지 궁금해지는
새밑이다.
<하영춘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