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수산지 뭔지 모르지만,좌우간 책임을 회피하니까 우리가 직접
응징하는 수밖에요"

"만약 청나라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쩔 작정이오? 청나라와의 전쟁을
각오하고서 파병을 하는 건가요?"

"통치권 밖이라고 해놓고서 전쟁을 하자고 나오기야 하겠소? 그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잖아요"

"좋아요. 앞뒤가 안 맞는다고 치고,그럼 문서를 받아놓았나요?"

"무슨 문서요?"

"대만의 생번인가 뭔가는 청나라의 통치권 밖이니 자기네가 책임질수
없다는 문서 말이오. 총서대신이 회담중에 구두로 한 것만으로는
아무 증거 능력이 없잖아요.

그런 사실을 문서화해 놓아야 나중에 청나라 쪽에서 항의를 해올때
확고하게 대응할 할수가 있는거죠. 국제법상 문서화가 안된 것은
증거로 인정하질 않아요.

증언만으로는 결말 낼 수가 없거든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장차 의견 대립이 되어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외교
문제는 반드시 문서화를 해놓아야 되는 거예요"

퍼크스는 마치 일본의 최고 책임자인 태정대신을 앞에 놓고 국제법의
기초 지식을 강의하는 투였다.

산조는 수치심에 절로 귀밑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애써
바짝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태정대신이오. 그런 문제는 외무경이 알아서 할 일 아니겠소.
퍼크스 공사가 나를 찾아온 것부터가 관례에 어긋나는 일 같구려"

"내가 외무경을 찾지 않고,태정대신인 산조 도노를 직접 방문한 것은
사안이 아주 중대하기 때문이었지요.

외무경의 선에서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권한이
최고이신 산조 도노를 찾아온 것입니다"

퍼크스는 산조의 비위를 맞추듯 살짝 추켜올리고나서 다시 자기의 할
말을 서슴없이 쏟아놓았다.

"우리 영국측에서 보기에는 일본군의 대만 침공은 곧 청나라에 대한
선진포고와 다름이 없어요.

대만이 분명히 자기네 영토인데,그런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질 않고, 무력에 의존하게 되면 가만히 있겠어요?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애요? 어림도 없다구요"

"음- 말이 좀 지나치지 않소?"

"솔직히 말씀드린 겁니다. 우리 영국뿐 아니라,구미 여러 나라는
한결같이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잠자는 사자의 꼬리를 일본이 밟는 격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실수로
밟는 게 아니라, 알면서 일부러 말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