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도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나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타의 산업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행남사도 세계경제의 일부분인 이상
변화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하는데도 당시의 내 나이는
그런 현대적 경영감각을 발휘하기 힘든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행남사도 경험에만 의존하는 경영스타일을 벗어나 국제감각과 전문
지식을 갖춘 보다 과학적이고 창의력있는 차세대 지도체제로의 재편이 절실
했다.

그리하여 82년5월, 나는 행남사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사장직을
장남인 김용주사장에게 물려주고 나는 회장으로 2선 후퇴하였다.

장남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을때는 내가 아버님의 가업을 물려받았듯 나의
장남 또한 그러기를 내심 바랬었건만 어린 그일지라도 일방적으로 강권할
수는 없는일.

하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한뒤 한국 생산성본부의 경영지도실에 들어가
기업진단 일을 맡아 근무하는 것으로 나의 바램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는 그곳에 근무하면서 전국 유수의 기업경영사례를 분석, 새로운 경영
기법을 배우는 한편으로 자신의 경영지식을 쌓아 앞날에 대비했다.

나는 그를 회사로 불러들여 하급간부로부터 시작해 10여년간 생산부
기획관리부등 중요 부서들에 근무시키면서 경영 실무에 대해 철저히
익히도록 해왔던 것이다.

3대 김용주 사장의 취임으로 행남사는 국내 기업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드문 경영 3대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 경영에서 전적으로 손을 뗄수는 없었던 터로 오늘날
까지 나는 매일같이 아침 9시면 정확히 회사에 출근해 필요한 일을 본다.

경험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나의 조언이 필요할 것이므로 그것이 나의
일인 까닭이다.

이후 김용주사장은 나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줬다.

84년 목포 석현동에 본차이나 공장을 설립해 구미에서 도자기의 여왕으로
까지 극찬을 받고있는 본차이나 제품의 본격생산에 나섰다.

1957년에 개발에 성공했으나 경제사정상 상품화가 안됐던 이것을 마침내
27년만에 본격 상품화에 뛰어든 것이다.

이 본차이나 제품은 86년 한국디자인 포장센터에서 주관한 우수디자인
심사대회에서 도자기제품이 획득한 10개의 GD마크중 무려 9개를 차지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이후로도 행남사는 계속 GD마크를 추가해 94년 현재 전체 46개의 제품이
GD마크 제품으로 선정되었으며 86년에는 행남사 전 공장이 "품질관리1등급
공장"으로 지정되었고 89년에는 본차이나식기가 도자기제품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KS마크를 획득했다.

86년 7월에는 도자기식기의 수입자유화정책에 따라 행남사에 일대 비상이
걸렸다.

나는 이에 대처할 신제품 개발에 착수, 30여명의 특별연구팀의 피땀어린
노력끝에 10여년전 꽃피우려다 실패한 신소재 파인세라믹스의 기술을
원용하여 꿈의 도자기인 "울트라파인" 개발에 성공했다.

울트라파인(초정자기)은 인그레이스 화공방법으로 섭씨 1,380도에서
처리한 환원자기로 고급도자기의 척도가 되는 백색도가 지금까지 개발된
자기제품중 세계 최고수준이다.

이 파인세라믹스는 자기 뿐만이 아니라 인공치아 뼈등에서 정밀전자제품
신소재에 이르기까지 그 응용범위가 이루 헤아릴수 없을만큼 다양한 것으로
우선 자기분야에서의 시급한 상품화가 절실했다.

때문에 나는 이 꿈의 신제품소재가 개발에 성공한 즉시 이를 생산할 공장
건설에 착수해 연간 200만개 생산규모의 울트라파인 공장인 행남사 제5공장
을 목포시 하당지구에 건설했다.

이로써 행남사는 울트라파인 본차이나 스노우본차이나 아이보리차이나
스톤웨어등 다양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수 있게 되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