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에 접어들면서 회사의 경영수지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전쟁복구와 부흥을 위한 재건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당시 행남사에서 연료로 사용하고 있던 유연탄의 수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여기에 신규설비투자가 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돌출구를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신제품 개발로 그활로를 삼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행남사의 제품들은 막사발 대접 탕기 초꽂이등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생필품 중심이었는데 생활문화의 변화로 신상품수요의
가능성이 컸다고 본 것이다.

이미 커피는 서울의 다방가를 중심으로 착실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생활수준이 나은 일반 가정에서도 즐겨 찾는 기호품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 국내 최초로 커피세트를 만들기로 했다.

커피세트는 한번 구워낸 커피잔위에 그림을 넣어 다시 굽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이는 종전과 같은 공정만으로는 불가능했으므로 우선
상회화공가마를 설치해 미숙한대로 첫제품을 완성해냈다.

제품이 나오자 판매는 예상대로 호조였다.

행남사가 막사발 대접등을 내놓아 목포사기라는 대명사로 전국에 알려진
이래 국내 최초로 제조,시판된 가느다란 손잡이와 원추형의 날렵한 형태의
커피세트와 양식기는 이제 목포사기의 또다른 대명사가된 것이다.

이렇듯 신상품 개발이 호조를 보이자 나는 1957년에 또다른 신상품개발
에 나섰다.

일찍이 영국 황실의 궁중식기로 잘알려져있고 구미 각국에서도 도자기
기술의 최고봉으로 인식된 본차이나 제조기술에 대한 도전이었다.

본차이나 제품은 원료에 소뼈가루를 섞어 구워낸 도자기로 자기 품질의
기준이되는 백색도가 뛰어나고 투광성이 높으며 보기에도 뛰어난 미적
감각을 갖춘 서양상류층 주부의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나는 이것을 행남사의 자체 기술로 개발하기로 하고 기술개발부 설치와
더불어 기술진들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이 기술을 순순히 가르쳐줄리 없었다. 아주 기초적인 이론
만을 배워온 기술진들에 의해 제품개발이 시도되었다.

원료는 직접 가공키로 하고 소뼈를 사모아 태운뒤 가루를 만들어
썼다.

하지만 이때 소뼈를 모아 저장하니 벌레가 모여들고 이것을 태우니
악취가 나는등 뜻밖의 장애가 생겨났다.

소성온도와 유약처리에 있어서도 종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술이
요구되기도 했다.

이런 난관을 뚫고 마침내 기술진들은 본차이나 완제품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본차이나 제품은 그해 12월 열렸던 전라남도 물산공진회에
출품되어 공진회장 특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것은 끝내 시판에까지 이르지 못했으니 그것은 본차이나 제품이
제조원가가 높은 고가제품으로 당시 국내 경제사정과 일반가정의 생활
수준상 도저히 시장형성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리 좋은 제품을 개발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장성이
있는 상품이 되지 못하는 한 기업으로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기업
경영의 철칙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 했다.

이 본차이나 제품이 시판된 것은 1984년.본차이나공장 준공 이후 너무
때이르게 개발된 기술은 막대한 예산만 축낸채 장장 27년이나 묵혀있어야
했다.

이렇듯 본차이나 제품의 시판에는 실패했지만 기존의 사기제품들과
커피세트, 양식기들만으로도 행남사의 경영은 착실한 성장을 보였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