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등 10개 합성수지업체 사장단은 지난 1월14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긴급모임을 가졌다. 시장질서 회복을 위한 감산을 협의하기 위해서 였다.
갑론을박끝에 공장별로 히테를 1갰기 끄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1년에
30일 이상, 2년에 80일분의 생산을 줄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로부터 두달이 채안돼 경기가 눈에 띄게 나아지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탈출하는 조짐들이 뚜렷해졌다. 상승세는 갈수록 빨라졌다. 요즘에는 풀
가동을 해도 달라는 물량을 공급하기가 어려워졌다. 감산이란 말을 꺼냈
다가는 수요업체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형편이다.

올들어 석유화학업계는 ''바닥과 정상''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투자
자유화가 몰고온 단물과 쓴물을 한꺼번에 맛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88년 11월 23일 ''석유화학 공업 누자지도 방안''을 발표, 석유화학
분야 신규투자를 90년부터 자유화했다. 이는 울산석유화학단지건설(68.11~
72.10) 여천석유화학공단건설(76.11~79.11)에 이어 한국석유화학산업에 큰
획을 긋는 조치였다. 그런만큼 기대와 우려가 엇갈렸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려했던 부분들이 먼저 현실로 드러났다. 공급과잉현상이 표면화
돼기 시작한 것이다. 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졌다. 쏟아져 나오는 물량을
소화하려고 출혈과당경쟁을 벌였다. 내수는 물론 수출시장에서까지 치고
받는 싸움을 했다. 제값을 받을 수 가 없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물론이다. 91년 2천억원이었던 업계 전체의 적자규모가 92년에는 5천
억원으로 늘어났다.

급기야 국내 최대이자 최초의 합성수지업체인 대한유화가 법정관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부작용들이 투자자유화의 결과라고 할수만은 없다. 주된 원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세계경기 때문이다. 4~5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경기
사이클로 볼때 불황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상공
자원부가 당초 예상한 수급전망이 빗나가면서 불황이 더 빨리 심하게 찾아
왔다는데 있다.

상공자원부는 투자를 자유화 하더라도 신규공장들이 94년 이후에나 정상
가동돼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의 대규모 콤플렉스가 91년 하반기
부터 가동에 들어가면서 수급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기존 업체들도 신규
업체에 뒤질세라 신증설에 박차를 가했다. 합성수지 생산량이 내수를 배나
웃도는 공급과잉 몸살이 표면화한 것이다.

투자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투자자유화는 많은 문제를 몰고왔다.
자유화이후 3년동안 석유화학에 쏟아부어진 5조원이상의 투자는 자금의
흐름을 뒤틀리게 했다. 생산현장 근로자의 임금을 끌어올리는 부작용도
야기시켰다.

반면 투자자유화는 우리산업의 경쟁력을 한단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전형적인 내수산업이었던 석유화학을 수출산업화했다. 덕택에 만성
적인 적자를 보여온 석유화학부문의 국제수지가 지난해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섰다. 올해는 흑자규모가 5억달러선에 이를 전망이다.

석유화학업계의 희생(적자경쟁)으로 국제수지 개선 효과를 거둔 것이다.
미국 유럽 등의 잇따른 사고를 틈타 수출시장에서 특특히 재미를 보고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선진국형 산업구조의 변신도 투자자유화의 한 성과이다.

경쟁체제 도입으로 공급자 중심의 시장구조(Seller''s Market)가 수요자
위주 (Buyer''s Market)로 바뀌었다. 수요자들이 물건을 골라 사는 시대가
열렸다. 독과점의 틀이 깨지면서 국내 유화산업을 국제화한 것이다.

석유화학업계는 투자자유화로 큰 타격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값진 경쟁의 논리''를 터득했다.

투자자유화가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실력을 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김경식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