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소. 그러나 나는 이미 정치에서 뜻이 멀어진 사람이오. 내가 권력에
미련이 있었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요. 도쿄에서 얼마든지
다시 뒤집어 엎을 수가 있었소. 기리노가 나에게 한마디 명령만 내리라고
했었지 뭐요. 그러면 당장에 근위군을 움직여서 태정관을 점령하고, 오쿠보
일당을 체포하겠다는 거요. 내가 안된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지 뭐요"

"그러나 오쿠보의 소행이 괘씸해서도 어떻게 끝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때가 오면 다시 권력을 쟁취해서 오쿠보를 납작하게 만들어
야지요"

"오쿠보의 소행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싶지만, 권력이라는 것에 나는 이제
신물이 났다오. 서로 안지려고 헐뜯고 싸우는게 바로 그거더라구요. 정나미
가 떨어졌소. 고향에 돌아와 이렇게 흙을 주무르고, 사냥이나 다니면서
사니 정말 살맛이 나지 뭐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얘기는 꺼내지 마오"

"예, 알겠습니다"

오야마는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사이고는 싱그레 웃음을 떠올리며 말머리를 돌렸다.

"오야마상, 금년에 가고시마의 농사가 어떻소? 풍년이오?"

"풍년이라고 할수 있지요"

"다행이구려. 풍년이라도 들어야 백성들이 살기가 좀 낫지"

"그렇지요"

역시 사이고는 덕인이라는 듯이 오야마는 존경을 담은 그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이고가 권력의 무대에서 퇴장한지 불과 십여일 뒤인 11월5일에 조선국
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십년 집정끝에 실각하였다.

공교로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 소식을 사이고는 얼마 뒤에 들었다.

역시 현령인 오야마의 입을 통해서였다.

오야마는 국내외의 중요한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사이고를 찾아 알려주곤
했던 것이다.

"아, 그래요? 그것 참 희한한 일이구려. 대원군이 내가 그만두니까 자기도
따라서 그만둔 모양인데. 헛헛허..."

사이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대원군이 그만두었으면 이제 조선국의 대일정책도 달라질거 아니겠어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요"

"사이고 도노가 전권대사로 가셨더라도 대원군과 담판을 벌이지는
못했겠는데요"

"그랬겠는데. 그 영감과 만날 인연이 아닌 모양이지.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