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7월8일 오후의 일이다. 광화문에서 청와대쪽으로 꼬부라지는 길
모퉁이.

서울 2오 7901 번호판을 단 검정색 그랜저 승용차가 빗속에 서있는 50대
초반의 한 신사앞에 멈춰선다.

신사가 노란 서류봉투를 재빨리 창문안으로 집어넣자 승용차는 삼청동쪽
으로 쏜살같이 내뺀다.

수상쩍기만한 신사옆에 즉각 경찰이 나타난다.

"신분증을 보여주실까요" "경제기획원 장관 비서입니다. 바로 저차가 장관
차입니다. 급한 서류가 있어 전해드린 겁니다"

신사는 장관비서가 아니라 실은 이경식부총리 자문관인 양수길박사. 그가
"길거리 접선"을 시도하면서 "007 영화의 주인공" 노릇을 한 것은 극비문서
를 전달하기 위한 것.

극비문서는 다름아닌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할 금융실명제 1차보고서.
장관실에 들락거리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부총리와 짜고
이렇게 접선한 것이다.

"그날 접선때는 카피본 하나가 더 있었는데 경찰이 보자고 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부총리비서라고 둘러댄 거지요"(양교통개발연구원장)

양박사가 이부총리로부터 실명제 준비를 지시받은 건 93년 6월22일
(이부총리는 29일로 기억하고 있으나 양박사는 22일이었다고 한다).

부총리의 여비서인 이수현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장관실에 들어선 양박사를
본 이부총리는 방안에 있던 강봉균 대외경제조정실장(현재 노동부차관)등
대조실직원들을 물린다.

양박사가 강실장이 앉아있던 자리를 잡는다. "양박사, 이제 금융실명제를
실시해야 하겠소. 각하 지시가 떨어졌었어요. 양박사가 수고를
해줘야겠습니다"

갑작스런 부총리의 말에 양박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언제쯤
하게 됩니까"

"국회 개원전에 해야 하니까 늦어도 9월전에는 실시해야 할 겁니다. 지금
부터 부지런히 준비하면 8월말까지는 가능하겠지요"

양박사는 이부총리 비서가 가져온 달력을 보면서 말한다. "아무래도
토요일이 나을 것 같습니다. 8월 마지막 토요일이 28일 입니다. 28일 아니면
21일로 건의하시는게 좋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보안을 철저히 지키도록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선 생명까지 걸어야 합니다. 지난번 KDI에서 와 보고하던 키 큰 사람
있지요. 김준일박사라고 하던가요. 그 친구를 활용하면 어떨까요. 사람이 더
필요하면 양박사가 알아서 구하도록 하세요. 내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극소수의 사람만 참여시키고 인원을 점차 보강해야 할 겁니다. 피라미드식,
그리고 점조직으로 작업팀을 구성하는게 좋겠지요"

이렇게 해서 양박사는 김대통령-이부총리로 이어지는 "실명제 핫라인"에
포함된다. 이부총리의 표현대로라면 "피라미드 조직"의 실무조정역으로
선발된 것이다.

"내가 실명제를 준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총리가 나를 왜 선택
했는지 짚이는 게 없었다. 3개월전 자문관에 임명되기 전까지 이부총리와는
일면식도 없었지 않은가. 흔한 지연도 학연도 닿지 않았다. 이부총리가
고대 출신인 반면 나는 경기고 서울공대를 나와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그저 KDI에서 근무하던 백면서생이
아닌가"는 게 양박사의 후일담이다.

이런 경력의 양박사가 어떤 연유로 "피라미드 조직"의 정점에 올랐을까.
여기서 양박사에 얽힌 일화를 더듬어 보자.

80년대 중반 개방론이 일고 있을 때였다. 농산물시장개방문제를 주제로
KDI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하는 그에게 난데없이 쇠똥이
날아들었다.

"쌀시장을 개방해야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양박사의 발언에 농민대표들이
흥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쌀개방을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게
우리나라의 수준이었다.

5공초 해외협력위 기획단장 시절 개방론을 폈던 김기환씨(현 무공이사장)
같은 사람은 미중앙정보국(CIA)첩자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모를리 없는 양박사는 "쇠똥세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소신"이 돋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피라미드 점조직의 핵심으로 될
만한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이부총리도 이를 염두에 두고 그에게 일을 맡긴 것은 물론 아니었다.
페이퍼워크로만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기획원이다.

"실명제연구" 역시 노하우는 재무부다. 그렇다면 이부총리는 왜 양박사를
택했나.

"하나는 계선관료조직을 동원할 경우 비밀유지가 어렵다는 점 때문
이었습니다. 기획원이나 재무부의 라인조직에서 사람을 빼 보십시오. 동료는
물론 업계에 탐지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실명제에 관한 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관리들이 적었어요. 실명제는 대부분 ''천천히''였어요.
다른 생각을 하면 비밀이 샐 수 밖에 없습니다"(이부총리)

그러나 이런 "전술적 이점"만으로 양박사가 낙점됐다고 보긴 힘들다.
이부총리가 노린 건 KDI박사들이었다.

이부총리는 이들을 통해 실명제작업 구상을 했고 KDI박사와의 연결고리로
양박사를 택한 것이다.

"이부총리는 그해 3월부터 은밀한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의견을 청취하며
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재무부의 구상을 들어본 것은 물론이고
한국은행 KDI의 보고도 받았습니다. KDI팀은 특히 3월에 1차로, 5월중순께
2차로 두번씩이나 보고를 했지요"(양원장)

3월에 있은 KDI의 첫번째 보고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형식도 신임 부총리
에게 경제전반에 관해 보고를 하는 식이었다.

KDI의 송희 원장과 연구위원들은 분야별로 보고했다. 금융실명제에
대해서는 주로 김준일박사가 맡았다.

김박사의 보고요지는 3단계 실시방안이었다. 실명거래의무화-이자.배당
소득 종합과세- 주식양도차익과세등으로 나누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위해서는 전반적인 세제개편이 필요하기 때문에 뒤로
늦출 수 밖에 없고 주식양도차익과세는 선진국에서도 조심스럽게 실시하고
있는 만큼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주식양도차익과세제도의 도입문제는 대만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증시
충격 때문에 당초계획을 완화하고 8개월만에 분리과세로 전환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 주식양도차익과세는 어려울 것임을 지적했다.

김박사는 가능한 한 예고기간을 짧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러나 전격실시나 긴급명령이란 용어는 이때까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5월의 김박사 보고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내용도 극히 간단
했다.

"3~4쪽 짜리 보고서였습니다. 내용을 보니 예고기간을 두지말고 전격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긴급명령 아이디어는 그때 떠올린 것이지요"
(이부총리)

이부총리는 이런 인연으로 KDI에 무게중심을 두게 되었고 양박사는 그래서
선택된 것이다.

부총리에게 "발탁"된 양박사의 실명제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그의 경기고 3년 후배로 6공때 재무부와 함께 실명제 작업을 한 경험이 있는
남상우박사에게 전화를 건다.

"부총리에게 실명제작업 준비명령을 받았다. 사람을 소개해 달라"

남박사는 역시 이부총리의 머릿속에 박힌 경기고 후배 김박사를 소개한다.
사람이 부족하다는 양박사의 권고로 그도 물론 비밀작업팀에 참여하게 된다.

다음은 남박사의 회고.

"양박사의 전화를 받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페이퍼워크
연습만 또 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며칠뒤인 6월25일 마침 KDI
주최로 수안보에서 정책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기획원관료들과 출입기자들이
참석했더랬죠. 이부총리는 좀 늦게 왔는데 양박사가 소개를 합디다.
이부총리는 그저 잘 해 달라고만 얘기를 하더군요. 그때가서야 어렴풋하게
나마 ''정말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라미드 조직의 맨 윗 단계에 선 KDI박사들은 철저한 이중생활에
들어간다.

낮에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밤에는 양박사와 만나
논의를 한다.

이렇게 해서 실명제가 골격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긴급명령안의
골간을 짜는데 보냈습니다. KDI팀이 작성한 1차보고서는 7월8일 이부총리에
의해 김대통령께 보고됐습니다. 내가 중앙청 옆길에서 부총리와 비밀접선
으로 넘겨준 서류가 그것이었죠. 여기에는 실시시기, 실명거래대상 및
범위, 자금출처조사범위등 실명거래의무화에 관한 9개 항목과 통화 및 여신
관리방안등 5개 보완대책이 포함됐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2개 이상의 대안도 써넣었습니다.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항도 명기
했고요"(양박사)

이 시안은 이부총리와 KDI팀간에 세차례 "조율"을 거친 끝에 확정된다.
양.남.김박사가 심야에 논현동 이부총리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부총리는 우리집에서도 비밀이 샐 우려가
있다면서 옆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부총리댁은 빌라였는데 마침 옆집이
비어있다는 거였어요. 아무런 가구도 없는 빈집에서 그동안 검토한 자료를
꺼내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지요"(김박사)

여기서 일찌감치 결론을 낸 부분은 <>예외없는 실명화 <>실명전환의무기간
의 설정 <>자금출처조사대상 등이다.

<>종합과세를 2단계에서 실시한다는 것과 <>주식양도차익과세는 98년
이후로 넘긴다는등 "대원칙"도 이론이 없었다.

문제는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서였다. 예컨대 실명전환의무기간의 경우
KDI팀은 당초에는 1주일을 생각한다.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이유였다. "1주일"은 다시 2주일로
늘어난다.

다시 "2주일"은 맨 처음 발표때 나중에 다시 "2주일"의 기한을 더 주는
것으로 했다.

이 실명전환의무기간은 결국 재무부팀이 합류하면서 두달로 늘어나지만.
(재무부는 금융기관 예금계좌수가 1억9천만개나 돼 적어도 두달은 필요
하다고 했고 그것이 최종안으로 채택된다)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부분은 또 있다. 주식시장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실명제 실시가 발표됐을 경우 주식시장이 당장 커다란 요동을 칠 것은
불문가지였다.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이게 실무팀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등장한 셈이다.

그때 이부총리는 사흘정도 주식시장을 문닫으면 어떠냐고 했다. 사실 주식
시장이 계속 폭락장세를 보인다면 실명제는 물건너 갈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KDI팀의 의견은 달랐다. 특히 남박사는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맞섰다.

결론은 남박사의 승리로 끝난다. "결과론이지만 잘 됐다고 봅니다. 주식
시장이 실명제 실시 다음날인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동안은 폭락하기는
했으나 월요일부터는 안정되지 않았습니까"(남박사)

이처럼 KDI의 시안은 실명제의 뼈대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안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는 일. 실무자들의 검증작업과
구체적인 절차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안은 재무부로 건너간다. 대통령 보고가 있은 다음날인 9일
홍재형재무부장관과 김용진세제실장(현 재무부차관)은 양.남박사로부터
시안보고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