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산조에게 속아도 이만저만 속은게 아닌것
같아 온몸의 피가 머리로 치솟는 느낌이었다.

틀림없이 재가가 내린 것처럼 얘기를 했었고, 자기도 예사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말이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사이고는 두눈을
감았다.

"그때 천황폐하께서 구미사절단이 돌아온 다음 모두가 잘 의논을 해서
합의가 되거든 다시 상주하라고 일단 보류를 하셨어요" 산조의 말에
사이고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목소리를 높여 뇌까렸다.

"왜 그런 사실을 그때 밝히지 않았소? 그런데도 마치 재가가 난 것처럼
아리송하게 얘기를 했느냐 그거요. 그 까닭이 뭐요?"

"이 자리에서 솔직히 털어놓겠는데, 그 사실을 밝힐 경우 사이고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것 같아 두려웠소. 내가 천황폐하께 말씀을 잘못드려
그런 결과가 됐다고 나를 원망할 것도 같고.

그리고 사실 나역시 천황폐하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가 국가의 중대사이기
때문에 사절단이 돌아온 뒤 전원회의에서 논의를 하여 결정하는게 옳다고
생각했소. 실은 그래서 6월에 조선국에의 사신 파견이 결정됐을 때도 나는
그 출발은 사절단의 귀국후로 미루었던거요"

사이고는 마치 자기가 바보가 된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메이지 천황의 재가가 난줄 알고서 조선국에 사신으로 갈 물심양면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문득 부끄러운 생각까지 들어서 이제 뭐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대신
이다가키를 비롯한 고도,에도등 강경한 정한파들이 산조의 그런 처사를
음흉한 술수라고 핏대를 세워 성토해댔다.

회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험악해지자, "조용히들 해요. 이제 내가 입을
열 차롄것 같소"하고 이와쿠라가 나섰다.

그는 우선 의제를 돌려야겠다는 듯이, "2년 가까이 구미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니 먼저 그 보고부터 하는게 순서가 아닌가 생각하오"
이렇게 허두를 떼어 차근차근 경과보고를 늘어놓았다.

귀국 즉시 메이지 천황 앞에서는 보고가 있었으나, 수뇌부 전원회의가
개최된 것은 처음이어서 한달이 지나 김이 많이 빠진듯 했지만, 그러나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간략간략하게 보고를 해나갔으나 워낙 여러 나라를 순방한 터이라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자연히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