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지고 풍성한 경기땅 천리/안팎으로 둘러친 산하/철용성같은 성벽"

조선조 개국공신 삼재 정도전이 서울의 산하를 예산했던 것처럼 서울만큼
지정학적으로 빼어난 수도터는 드물다.

도심이 북악과 그에서 좌우로 뻐어내린 낙산 인왕산, 남산, 한강등 산하로
겹겹히 둘러쌓인 천연의 요새를 찾아 보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거기에 그 산들을 잇는 성벽을 쌓아 놓았으니 금상첨화격인 수도가 아닐수
없었다.

서울의 성벽은 1396년(태조5년)에 축조되기 시작하여 그 2년뒤에 완공
되었다.

북악에서 시작하여 우측의 인왕산과 좌측의 낙산을 거쳐 남산에 이어지는
성벽을 쌓았던 것이다.

서울터를 잡을때 북악을 현무, 남산을 주작, 인왕산을 백당, 남산을 청용
으로 가늠했던 무학대사의 풍수지리를 한낱 근거없는 비과학적 설로 치부해
버릴수만은 없는것 같다.

그 도성을 따라 북에는 숙청문(숙청문 북대문)과 창의문(자하문), 남에는
숭예문(남대문), 동에는 흥인문(동대문)과 광희문 혜화문, 서에는 돈의문
(서대문)과 서소문등 8개의 도성출입문을 만들어 놓았었다.

그런데 지금에는 서대문과 서소문 혜화문의 자취를 찾아 볼길이 없게
되었다.

일제가 한국강점기에 도시계획과 도로확장을 구실로 철거해 버린 결과였다.

그것은 바로 일제의 한민족문화말살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서울시가 내년에 광복절 50돌을 맞아 4대문중의 하나인 서대문을
1915년에 철거된뒤 80년만에 옛모습 그대로를 복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우선 시당국의 결정이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서대문축조에 관련된
기록이나 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으로선 1892년에 찍어 놓은 한장의 사진이 유일한 근거가 되고 있을뿐
이다.

그것만으로는 개략적인 모습을 파악할수 있을뿐 건물의 평균 규모나
구도상의 특징은 전혀 알길이 없다.

더우기 복원착공 1년안팎을 남게 남겨놓은 시점에서 복원에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기록이나 자료를 확보하거나 관련 전문가들의 세부적인
의견을 청취도 하지 않은채 복원계획부터 불쑥 내놓은 시당국의 처사는
환영받을수는 없다.

그동안 시당국이 되풀이해온 졸속 내지는 전시행정의 또다른 표본이 아닐수
없다.

문화재복원은 일상의 건축행정과는 달리 사전에 철저한 고증과 검토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