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증좀 보여 주세요" "아니, 내통장에 내돈 넣는데 왜 신분을
확인합니까"(93년 8월) "무통장입금하시네요" "네, 주민등록증 여기
있습니다"(94년8월) 금융실명제실시이후에 달라진 은행창구 모습이다.

실시초기 잇달았던 창구마찰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불편하기만했던
신분증지참도 일상화됐다. 금융실명제실시 1년이 지나는 동안 일상생활도
알게 모르게 많이 변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기업경영 정치권 사채시장 금융거래등 모든 부문에서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실시초기 "극단화"됐던 신풍속도는 이제
"일상"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게 대체적인 평가다.

자기앞수표는 사양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신분증지참.
은행거래를 할때나 상가에서 자기앞수표를 사용할때면 반드시 실명
확인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공무원증등 "본인확인표"는 이제
필수품이 됐다. 행여 주민등록증을 지참하지 않을 경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그러느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

자기앞수표사용이 감소하고 현찰과 신용카드사용이 부쩍 늘어난 점도
새로 생긴 모습이다. 실명제실시초기만해도 자기앞수표기피현상이
두드러졌었다. "얼굴을 드러낸 돈"이어서 왠지 꺼려진 탓이었다.

대신 현찰을 선호, 일부 상가에서는 "자기앞수표는 사양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내걸기도 했다. 대신 신용카드사용은 급증하는 추세다.

기업체나 관공서등은 법인카드를 발급, 접대비를 사용케하고 있다.
개인들도 은행창구에서 실명확인절차를 거치느니 간단한 신용카드
사용을 선호하고 있다.

여기에 소비패턴이 급속히 변화한것도 한몫 거들었다. 변칙적인 "부의
세습"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탓에 "쓰고 보자"는 심리가 확산됐다.

회사원 김모씨(35)는 최근 2천만원을 시골집에 보내는데 말못할 속앓이를
했다. 무통장으로 입금했을 경우 행여 자금출처조사를 받지않을까하는
막연한 불안감에서였다. 물론 월급쟁이의 목돈이라 뒤가 구릴리가 없었다.

적금과 계를 통해 모은게 전부였다. 자금출처를 충분히 댈수 있지만
세무서에 불려다닌다는 것이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아직도 김씨와 같은 사람이 많다. 돈의 출처를 댈만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 것도 실명제이후 새로 생긴 풍속도다.

준비의 수단은 각종 "영수증모으기". 전자제품구입에서부터 점심값까지
이제 영수증거래는 필수가 됐다. 기업들은 물론 개인들도 "만일의 사태"
에 대비, 영수증을 꼬박꼬박 모으고 있다.

실명제는 또 상속과 증여자료의 양성화를 가져왔다. 변칙적인 부의
세습은 옛날이야기가 됐다. 변칙증여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다.
자연 합리적인 상속방법이 모색되고 있다. "사전상속"이 대표적이다.

정치자금 조달 새바람 기업의 돈관리에 변화를 몰고 온것도 빼놓을수
없는 현상이다. 차명이나 가명계좌개설이 불가능해지고 무자료거래가
위축되면서 이른바 "비자금"을 마련하기도 힘들어졌다.

대부분 기업들은 비자금조성을 아예 포기,경비로 인정되는 범위내에서만
접대비를 지출하고 있다.

그렇다고 비자금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속단하긴 힘들다. 오히려 실명제
그물을 피해 비자금마련방법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는게 업계의 얘기다.

예컨대 임직원의 이름을 빌려 "소액다계좌"로 분산시키고 있거나 해외지사
등을 이용,수출입자금을 통한 비자금마련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다.

실명제는 검은돈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정치권에도 새바람을 몰고 왔다.
대표적인게 정치자금조달의 양성화. 국고보조금과 지정기탁금이 "생존"의
차원에서 늘어났다.

"정치자금기부 정액영수증(쿠폰)제도"라는 방식도 도입됐다. 국회의원
들이 개인후원회를 구성,신문광고를 내는것도 이전엔 보지못한 풍속도다.

사채시장도 큰 타격 실명제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뭐니뭐니해도
사채시장. 사채거래가 실명제실시이전의 40%수준으로 위축됐다는게
사채업자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실명제실시초기 "어음박치기" "어음쪼개기" "어음및 통장꺾기"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 특유의 잡초같은 생명력을 이어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존재가 희미해지는 추세다.

그래서 국세청의 이목을 끌지 않을 정도의 소액거래가 가능한 신용카드
대출 주택청약통장대출 자동차담보대출등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한
"소매업"으로 업종전환한 사채업자가 상당수다.

금융거래패턴이 크게 변한 것도 특징이다. 은행원들은 이제 "도장보따리"
를 보관할 필요가 없어졌다. 도장보따리는 차명예금을 위한 것.

예금유치를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통장을 개설할때마다 사용했던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차명예금개설이 금지된 터라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제도든지 실시초기에는 많은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관습으로 자리잡는다.

실명제도 마찬가지다. 정도가 유독 심했다는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극심한 변화에 걸맞게 새로운 풍속도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는 실명시대,
흔히 말하는 투명사회로의 진전을 뜻한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