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공식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주석, 노동당총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위원장 조선인민군대원수등의 직함으로 당.정.군을 관장해
왔으나 실질적으로는 김일성이 바로 북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살아
있는 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북한에서 공식직책보다는 "위대한 수령" "어버이
수령"등으로 더 많이 불리웠다.

북한의 절대권력자인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날조되거나 미화
됐기 때문에 사실과 허구를 쉽게 분간할 수가 없다.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고 보천보습격등
항일투쟁 경력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성에서 태어났고 그의
생가는 현재 평양의 "만경대고향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곳은 북한주민은 물론 외국귀빈에게도 필수방문코스로 되어 있다.

아버지 김형직은 이지방에서 대대로 살아온 농민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강반석은 이웃한 용상면 하리 칠곡에 사는 하리교회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김형직은 1917년 3월 비밀정치결사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가했으며
1918년 2월 일제경찰에 이 조직이 발각되어 형을 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같은해 출옥한 김형직은 3.1운동이 일어났을때 이미 만주로 가 있었고 그
후 처자를 데리고 완전히 만주에 가서 살았다는 것이다.

소년시절 김일성은 부모슬하에서 만주의 한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11세에서 13세 무렵까지 혼자 고향으로 가 하리교회에서 설립한 창덕학교에
다녔고 그후 다시 만주로 돌아가 무송에서 소학교 마지막 1년을 다닌 것으로
돼있다.

1926년은 그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이해 그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항일민족주의 단체인 정의부가 개설한
화성의숙에 입학했다.

이해에는 또 아버지 김형직이 급사한 해다.

그는 이같은 급격한 신상변화 때문인지 입학하자마자 곧 화성의숙을 그만
두고 길림의 육문중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7년 육문중학에 들어간 그는 상월이라는 교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체계적
으로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월은 27년 중국공산당원이 된 사람으로 항주감옥에서 도망쳐 만주로
와서 이 학교의 국어교사가 된 사람이다.

북한은 길림육문중학시절부터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주도적으로
조직하는등 항일투쟁에 헌신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행적에 대해서는 그가 과거 행적을 조작하고 심지어는
"김일성"이라는 다른 유명한 항일투사를 사칭했다는 "가짜설"에서부터
실제 그가 항일투쟁 경력자라는 "진짜설"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견해가
혼재해 있다.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잡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 된후 소련군 장교로
북한땅에 발을 들여 놓았던 1945년 9월이다.

그는 45년 10월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김일성장군"으로
등장한뒤 같은해 12월 조선노동당 북조선분국책임비서로 출발 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948년 9월 제1기 내각수상에 올라섰고 49년 6월에는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당권도 장악했다.

그는 이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민족해방"을 위한 6.25를 일으켰고 전후
에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무정등 라이벌을 제거한 56년 8월의 "종파사건"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연안파마저 축출, 1인 장기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같은 1인 집권체제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된 1972년 주석제 도입으로
완결됐다.

김일성은 50년대이후 구소련과 중국의 갈등속에서도 교묘한 당다리 외교를
펼치는데 성공했고 동구의 공산제국이 와해의 길에 접어들었을때도 "주체
사상"으로 북한사회를 무장, 권력기반을 확고히 유지해온 정치학적으로는
보기드문 "특이한 지도력"의 소유자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