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이 온다/해바라기와 같이 뜨거운 사랑을 안고/칠월이 온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도/되돌아 설줄 모르는 해바라기/
너 정열의 화신 사랑이여" 이설주시인의 7월을 정열의 달로 노래했다.

무더운 날씨와 지루한 장마에 시달리는 달이면서도 폭풍이 몰아치고
뜨거운 탱야이 내려 쪼이는 젊음과 열정과 모험을 상징하는 계절이다.
그속에서 완숙이 육중하게 살찌워지는 성장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 계절처럼 열정을 화폭에 불사르다 간 조선조 초기의 화가 안견을 7월의
인물로 기리는 갖가지 행사가 서울과 그의 고향인 충남서산군에서 치러지게
된다.

안견은 신라의 솔거,고려의 이덕과 더불어 한민족 3대화가로 촉망받았지만
어떤 집안에서 언제 태어나 누구에게서 처 사사를 받았고 또 언제 죽었는지
조차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이 세상은 거침없이 훌훌이 살다간 기인같은
예술가였을까.

그의 사람 됨됨이와 족적을 살펴볼수 있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산 인물들이
남긴 모집의 기록들이다. 신숙주의후한 집"과 김안노의 "용천후숙기"다.

세종~세조 연간에 도화원의 화원으로 있었던 그는 벼슬이 정4품인 호군에
까지 이르렀다. 당시 화원의 승진 제한선인 종6품(선화)의 원칙을 깨고
높은 자리에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예술적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성품이 총성하고 민첩하며 정밀하고 박식했던 그는 안평대군의 곁에
있으면서 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곽희 이필 유융 마원등 중국대가들의
고화를 섭렵하면서 그들의 화법을 소화 절충하여 한국적 화풍을 만들어
냈다. 그는 특히 산수화에 특출하였지만 그밖에 초상 꽃 사조사 누각 말
갈대 기러기 <><>등 다양한 소재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화풍의 현재 남아 있는 "몽유도원도"(일본천리대 소장)와
"사시팔경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통해서 엿볼 수 있을뿐이다.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는 물론 필법에서도
한국적 체취가 물씬 풍겨 난다. 그밖에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문헌에 나와 있으나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회화사에서는 그를 추종한 많은 후세의 화가들을 안견파라고 일컬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안견의 우뚝한 화업이 오늘의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는 달로 새겨졌으면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