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왜란"이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다. 1510년4월4일 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 지원군과 합세,일제히 부산포와 제포를 공격했다.
두성이 쉽게 함락되자 왜인들은 그 기세를 몰아 웅천과 동래로 진격해
왔다.

나흘뒤에야 변란사실을 보고 받은 중종은 속수무책이었다. 근100년만에
변란을 당한 조정은 마땅한 장수조차 구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탐탁한
죄로 파면당해 집에서 놀고 있던 황형과 유연년을 방어사로 삼아 열흘이
지난뒤에야 겨우 원정군 400을 보냈다.

인심이 흉흉해 졌다. 원정에 차출된 군졸들이 대낮에 대로에서 부녀자
들을 희롱하고 서울의 난장패들이 이 기세를 타고 온갖 흉악한 짓을
해도 의금부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변란지역 인근이 고향인 조정의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은 가족들을 서울로
피난시키기에 바빴고 양식을 사재기에 급급했다. 그중에는 기미를 보아
벼슬도 사직하려는 자들도 많았다. 좌의정 유순정과 우의정 성희언은
현지에 내려가지 않으려고 서로 도원수 자리를 미루는 추태를 부려
임금의 빈축을 샀다.

천리 밖에서 일어난 왜인들의 난이 수도까지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위력을 보인 것을 보면 당시 나라의 방비상태가 보잘것 없이 허술했던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오합지졸이었던 우리 군대도 왜인쯤은 적수가 되지 않았던지
4개월만에 난은 평정됐다. 하지만 그 피해는 컸다. 사람이 272명,
소실된 가옥이 789채였다고 "중종실록"에는 기록돼 있다.

보위에 오른지 6년이나 가뭄이 계속돼 흉전이 들고 예측도 못한 왜인들의
변란까지 치룬 중종은 "나의 과실을 말하여 나의 부족함을 도우라"고
구언을 청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대사헌 이자건은 상소를 올려 사람부터 정해놓고 관직을 나누어
주는 정실인사, 형평의 원칙을 벗어난 형벌제도, 일관성 없는 법령의
제정등 실정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는 조정을 "마치 판자를 아교로 붙여 매를 만들고 썩은 새끼줄로
밧줄을 만들어 허수아비를 시켜 배를 부리게 하는 격"이라고 풍자,
임금을 "허수아비"로 몰아치면서 반성을 촉구했다.

국내외정세에 민감한 서울 강남지역 고급아파트촌주민들이 큰 소동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남이야 어찌되든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독선기신"이란 옛말이 실감나게 들린다.

사회의 외형적 모습의 변화가 빠른것에 비해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른것이 없으나 그것이 얼마나 더딘것인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성숙한 시민의식이 요즘처럼 아쉬운 때도 없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