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때는 대폭적인 보직인사이동을 며칠 앞둔 시점. "그동안 할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XX과로 가고 싶습니다" "저는 00과에 가서 승진준비좀 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들이 "희망"한 부서의 공통점은 이른바 한직부서. "불과 몇해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C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우리부처요? 뭐니뭐니해도 자문관실 보조원 자리가 최고죠. 인기보직
0순위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 지방사무소도 별로 뒤지지 않고요. 라인조직
에선 대외경제국이고요"(경제기획원 J사무관)
"무역위원회가 좋지요. 기업들의 산업피해구제를 맡는 일선부서라는 간판도
좋지만 무엇보다 한가롭지 않습니까"(상공자원부 H사무관).
"경제기획원 기획국, 재무부 금융정책국, 상공자원부 산업정책국" 이른바
빅3경제부처의 요직이 인기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까닭은 많다. 우선 업무가 문패가 가리키는 "기획.정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일다운 일"이 줄고있다. "일의 양"이야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게
없으면서도 질이 영 따르지 않는다. "흥"도 안나고 따라서 보람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경제부처 "핵심부서"에 있는 H사무관의 하루 일과를 보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전 8시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경제차관회의" 밑자료부터 챙긴다.
오전10시쯤 국장결재.
일부 보완을 지시받는다. 다시 작업. "급행"딱지를 붙여 차관결재를
겨우 받는다. 이 때가 오후2시.
곧바로 산하 경제연구기관에 발주할 정책용역사업 기획안을 입안한다.
기획안을 과장에게 보고하지만 "퇴짜"를 맞는다.
수정안을 매듭짓는 시간은 저녁 8시. 퇴근준비를 하다가 아차싶게 떠오른게
다음날오전 열릴 "00위원회" 준비자료.
이날도 퇴근시간은 밤10시를 넘긴다. "요직보다 한직"을 선호하는 두번째
까닭은 "누굴믿고 일하겠느냐"는 것.
"일을 해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문제가 생길 때 봐주는
사람도 없다" 하급경제관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드는 예가 농안법파동의
희생양이 된 농림수산부 조모사무관이다.
명문 S대법대 출신의 조사무관은 "한직에서 잘 지내다가 요직에 와서
신세를 망친" 대표적 케이스라는 것이다.
그는 농안법개정에 반발해온 중매인들을 달래랴, 도매시장 확충하랴
정신없이 9개월을 뛰어다녔다.
그 "보상"은 중매인파동에 대한 "책임"으로 직위해제통보를 당한 것.
그러니까 작년8월 법무담당관실에 근무하던 그가 농산물유통국장에게
스카웃되지만 않았어도 아무 탈없이 지낼 수있었을 것이란게 과천사무관들
의 "동정"이다.
한직선호의 세번째이유는 "일이 많으면 자기계발기회에서 밀려날 뿐"이란
피해의식에 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소속 모사무관은 얼마전 토플(TOEFL)점수 6백25점을
받았다.
"강남의 영어학원 강사나 받을 수있는 점수"다. 그러나 그는 국비유학생
선발시험에서 떨어졌다. 부처내 유학생 선발기준인 "토플성적 상위3명이내"
에 들지 못했기 때문.
"한가한 자리"에 있는 동료사무관들이 "죽기살기로" 토플공부에만
매달리는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상황이 이런 식이고 보니 "경제기획원은 대외경제국, 재무부는 국고국의
일부과와 재무정책국의 재정융자과, 농림수산부는 양정국, 상공자원부는
무역위원회, 건설부는 수자원국"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어느 부처 가릴 것없이 자문관실 행정관리관실 감사관실 비상계획관실등
이른바 "스태프"직도 같은 이유로 인기를 끌고있는 자리.
본부산하의 지방사무소도 인기순위에서 뒤지지 않는다. 한직이 주는
메리트는 또 있다.
승진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 승진순위를 따지는 업무평정제도가 그렇게
돼있다. 업무평정은 1백점 만점.
구성내역은 근평이 45점, 경력 40점, 교육평점 15점이다. "경력"이야
사무관생활 만12년이상이면 자동으로 만점이다.
교육평점도 만점을 받기는 어렵지 않다. 결국 변수가 되는건 근평. 국별로
상대평가를 하는 걸로 돼있다.
"똑똑한 동료"들이 몰려있는 핵심국에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점수 얻기가
힘들다.
"한직으로 가자"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한마디로 요즘 과천의 "계산기"는
요직보단 한직이 플러스쪽을 가리키게끔 작동되고 있다는 얘기다.
계산기의 두가지 잣대인 "보상과 리스크"를 풀어보면 그 메커니즘이
확연해진다.
요직의 보상으로 들 수있는 "일하는 맛"이나 "사이드 머니"가 사라진지는
오래다.
그런 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치자. 소신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해봤자
조금만 일이 잘못되면 "문책"이란 바가지나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한직에 있으면 리스크를 질 일도 별로 없고 "자기계발과 승진기회"
라는 무형의 보상이라도 있다.
"도대체 과천조직은 일하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불리하게끔 돼있다.
도저히 올라가서는 안될 것이란 소리를 듣는 사람이 승진하기가 일쑤인
반면 경쟁력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관료들이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악화가 량화를 구축하고 있다는 얘기다"(박운서상공자원부차관).
요즘 과천에 잔잔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는 사무관들의 "한직다툼"은 이런
과천판 "그레셤 법칙"을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