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 서울대교수/경제학 >

어떤 교수가 학생들을 공부시키려는 의도에서 예정에 없던 시험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재미없는 경제학 책과 씨름하는데 주말을 보낸
학생들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지만 시험을 주는 교수도 불편을 겪게 되는것은 마찬가지이다. 우선
시험문제를 내는 일도 그렇거니와 200명이나 되는 학생의 시험지를 채점
하는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사실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만들면 되었지 이들이 반드시 시험을
쳐야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공부하게 만든 다음 시험당일에 가서 취소
한다 해도 원래 의도했던바를 달성하는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시험을 예고하고 당일에 가서 취소하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아이디어
이다. 교수 자신은 아무 비용도 들이지 않고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을 몇번 반복하고 나면 시험을 본다고 예고해도
학생들은 으레 취소되려니 하는 기대에서 공부를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일관되지 않은 행동을 통해 한두번 이득을 볼수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
으로 보면 학생들을 의도한 방향으로 지도할수 없게 되는 손실을 입게 된다.

정부도 이처럼 일관되지 않은 행동을 통해 정책효과를 한층 더 높이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민들의 발명의욕을 복돋우기 위해 발명자에게는 특허권을
부여해 앞으로 20년간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자.

그런데 사회후생의 측면에서 볼때 일단 발명된 것이라면 여러 사람이 모두
활용할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부가 원래의 약속을 꼭 지키지 않는것이 더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독점적 사용권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발명을 촉진시킨 다음 모든
사람이 발명의 결과를 마음대로 활용하게 만든다면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는"일이 될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되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정책을 쓰더라도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모든 정책은 국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할것을 전제로 하고있다. 바로
이와같은 반응 때문에 정책이 효과를 나타낼수 있게 된다.

정부가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통해 신뢰를 잃는다면 국민들은 기대한 바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 뻔하다.

경제안정정책과 관련해서도 정부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고 있느냐
가 정책효과를 크게 좌우할수 있다.

예컨대 국민들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에 신뢰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정말로 물가가 쉽게 잡혀질수 있다.

근로자들이 이 약속을 믿고 임금인상요구룰 자제할 것은 물론 상인들도
틈만나면 가격을 올리려는 충동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부가 신뢰를 잃고 있다면 누구나 다 제몫챙기기에 바쁠것이고
물가는 계속 뛰어오르게 될것이다.

경제이론에서는 정부가 일관되지 못한 행동을 통해 신뢰를 잃고 그결과
정책의 효율성마저 희생하게 되는것을 "시간불일치의 문제"(time
inconsistency)라고 부른다.

구태여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뢰를 받는 정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