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후의 일본 엔화 환율및 환율관리정책 변천 과정은 대략 4단계로
나눠볼수 있다.

제1기(45년8월~64년3월)는 종전 직후 극심한 외환부족으로 자본거래는
물론 무역등 경상거래에 수반되는 외환거래까지도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했던
강력한 외환관리법을 시행했던 시기다.

제2기(64년4월~73년1월)는 일본이 64년4월 국제통화기금(IMF)8조국으로
이행하면서 경상거래에 수반되는 외환거래에 대해 국가의 통제를 일부
완화한 시기다. 이기간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으로 가입하면서
자본거래에 수반되는 외환거래도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일부 허용하기
시작했다.

제3기(73년2월~80년11월)는 2차대전후 유지돼왔던 IMF고정환율제가
붕괴되고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따른 균형에 의해 결정되는
변동환율체제로 이행됨에 따라 환율안정을 정책의 주안점으로 삼았던
시기다. 특히 이기간중에 발생한 1차및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고 일본의 국제수지가 급격히 변동되는등 극히 불안한 상황이 유발돼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거래에 대한 통제강화 또는 완화를 되풀이 했다.

제4기(80년12월~현재)는 80년12월 신외환관리법을 시행한 이후 현재까지의
기간으로 이기간중 경상거래에 대한 외환거래를 완전히 자유화시켰다. 자본
거래 역시 대부분 자유화되었다. 특히 일본경제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짐에 따라 외환거래에 대한 통제는 되도록 피하고 금융시장을
국제화 시키는데 정책의 주안점을 두게 됐다.

일본이 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한 것은 제3기에 속하는 73년2월이었다. 이때
이후의 엔화 환율 움직임을 살펴보면 달러당 3백1엔 선에서 변동되기 시작한
엔화가치는 2월말 달러당 2백70엔까지 치솟아 달러에 대해 약11%가 평가
절상됐다.

엔화의 평가절상추세는 같은해 7월까지 계속돼 73년7월말에는 달러당
2백63.45엔을 기록했다. 그러나 73년 3.4분기이후 국제원유가격의 상승과
함께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평가절하되기 시작하여 74년1월말에는 환율이
달러당 2백99엔으로 상승(엔화 평가절하)했다.

그이후 76년말까지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달러당 2백80~3백5엔
수준에서 안정됐다.

77년1월부터는 일본 무역수지및 경상수지 흑자확대에 힘입어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점진적으로 평가절상되어 78년10월말에는 달러당 1백76엔으로
하락(엔화 평가절상)했다.

79년 2차석유파동이후 국제원유가격상승과 함께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다시 평가절하돼 80년2월말에는 달러당 2백50엔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2차석유파동기간동안 원유가격상승이 일본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1차석유
파동때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80년4월부터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평가절상되기 시작하여 같은해 12월말에는 환율이
달러당 2백3엔으로 하락했다. 제4기에 속하는 81년부터는 엔화가 다시 평가
절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의 고금리영향 때문이었다. 그뒤 엔화는
82년10월 달러당 2백30엔내지 2백50엔 사이에서 안정됐다. 그러나 85년9월
서방선진7개국(G7) 재무장관회담에서 미국 달러화의 고평가상황을
시정하기로 합의한 플라자합의이후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시장개입및 원유
가격하락으로 87년말까지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대폭적으로 평가절상됐다.

87년12월말 엔화 환율은 달러당 1백23.5엔을 기록, 엔화가치는 플라자
합의이전에 비해 1백%이상이나 평가절상됐다.

88년이후 90년중반까지는 엔화가 달러화에 대해 과대평가됐다는 인식과
함께 엔화가 다소 평가절하되어 90년6월에는 1백52.9엔에 이르렀다.

90년 중반이후 엔화 환율은 걸프전 발발등으로 인해 다소 기복이 있었으나
계속적인 일본의 무역흑자 확대로 엔화가치가 꾸준히 평가절상되어
92년말에는 달러당 1백25엔에 도달했다.

93년 들어서도 엔화는 그칠줄 모르는 강세 행진을 계속했다. 엔화는 도쿄
외환시장에서 8월16일 달러당 1백1.25엔(폐장가기준)을 기록한데 이어 17일
장중 한때 달러당 1백.40엔까지 치솟아 사상 처음으로 1백엔대에 거래되는
초강세를 보였다.

이로써 엔화는 93년들어서만 8월 중순까지 20%가량 절상되는 강세현상을
보였다. 주요선진국간 엔화강세유도 합의가 이루어졌던 지난 85년의 플라자
합의 작전에 비해서는 60%이상 뛰어 올랐다.

이에따라 일본 엔화가치는 지난 72년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바뀐
이후 연평균 5%씩 상승하면서 마침내 달러당 1백엔 시대를 맞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갔다.

이같은 엔고는 지난71년 8월15일 미국 닉슨대통령의 금태환정지선언으로
브레튼우즈체제가 붕괴된 이후 시작된 1차 엔고파동에 이어 78년 미경상
수지의 적자체질화로 인한 2차 엔고, 85년 플라자합의에 의한 3차 엔고에
이어 4번째 찾아온 것이다.

4차 엔고는 93년 4월 미일정상회담때 빌 클린턴 미대통령의 엔고 용인
발언으로 촉발된 감이 농후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냉전구조 종식에 따른
세계 정치.경제구조 변화와 일본의 지속적인 흑자무역 확대에서 찾을수
있다.

과거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힘을 잃어갈때 독일 마르크화는 엔화와 함께
조정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독일은 냉전구조 붕괴로 동서독이 통일 되면서
엄청난 재정적자및 경상수지적자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따라 유럽 환율조정장치(ERM)의 변동폭 확대등 유럽통화불안에 따른
투기자금이탈은 둘째 치고라도 방대한 무역흑자를 내고 있는 일본의 엔화
이외에는 자금이 갈데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일본은 92년에 이어 지난해도 1천2백4억달러에 달하는 사상최대 규모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92년의 1천66억3천만달러보다 13% 늘어난 것이다.

대장성 발표에 따르면 특히 지난해 대미 무역흑자는 5백1억9천만달러(통관
기준)에 달해 92년의 4백35억6천만달러 보다 15%가 증가했다.

빌 클린턴 미행정부는 세계경기침체와 고용감소 원인중의 하나가 일본의
생산과잉과 내수부족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이 시장개방및 수요
확대를 통해 경상수지 흑자를 줄이기 원했으나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차선책으로 엔화강세 유도 압력을 가중시킬수 밖에 없게 됐다.

<김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