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73) 서울올림픽 유치작전..조중훈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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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은 참가 규모나 성과면에서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올림픽 서울 유치방침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에 의해서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으로 부상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음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해 81년9월 세계각국의 IOC위원들이
서독의 바덴바덴에 모일 때가지도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불투명했다. 오히려
일본의 나고야시가 유력한 후보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우리측 올림픽 유치단이 81년여름 바덴바덴을 중심으로 각국의 대표들을
설득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할 당시, 나는 남덕우 전총리를 단장으로 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출장중이었다. 이때 서울로부터
사절단장을 통해 내게 전보가 한통 날아왔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83차
국제올림픽 조직위원회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측 올림픽 유치대표단과
합류해 달라"는 정부 고위당국자의 전보였다.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프랑스 IOC위원들이 한국을 지지하게끔 책임지고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IOC위원중 한사람은 보멍이라는 귀족 출신의 백작이었고 또 다른
한사람은 전각료이자 세계 최초로 별도 산소공급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던 프랑스의 영웅 에로조그씨였다. 나는 73년부터 한.불경제협력
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을 맡는등 여러가지 인연이 있어 프랑스의 저명인사들
을 많이 알고 있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이래 77년
에는 프랑스 일등공훈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모임
에서 웬만한 유명인사들을 대부분 만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일정들로 볼일이 많았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기꺼이 협조했다.
나는 프랑스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일본으로 날아갔다. 싸움터에 가려면
적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나고야에서는 올림픽
유치 열의에 못지 않게 반대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서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유인물들을 수집하고 몇가지 준비를 한뒤 파리로 갔다.
프랑스의 IOC위원들을 만나 일본내에서는 나고야 시만들이 올림픽유치를
반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한국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에로조그 위원은
한국이 아직 개발도상국으로서 올림픽 개최는 부담이 클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그대로 물러설수 없기에 나는 그와 절친한 인사들까지
파악하여 설득에 들어갔다. 결국 세번이나 찾아가는 삼고초려끝에야 우호적
인 대답을 받아낼수 있었다.
바덴바덴에서 우리측 유치대표단과 합류한 나는 아프리카 리비아대표인
아타라불시씨도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측 인사와의 관계에서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지 무척 완강한 태도
를 취했던 그를 내가 설득하기로 했다. 숙소까지 방문하여 "같은 개발
도상국으로서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회에 결속을 다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올림픽 서울
개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됨을 역설했다.
이러한 나의 호소에 마침내 아타라불시씨도 수긍을 하는듯 했다. 다음날
총회 석상에서 그는 88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까지
해주었다. 이러한 노력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유치단원들도 대개 비슷한
사정이었다.
결국 81년 9월30일 당초 예상을 뒤엎고 한국이 많은 표차로 일본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 서울 유치를 따냈다. 이어 85년 서울올림픽 공식항공사로
지정된 대한항공은 20년 역사의 항공수송능력을 총결산하는 각오로 올림픽
에 임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성화봉송을 위해서는 관련부서 합동
으로 사전답사까지 실시했다.
선수단 수송을 위해 이익을 초월한 봉사라는 마음가짐으로 몇차례에 걸쳐서
특별기를 운항했다. 아프리카 선수단과 헝가리 선수단을 수송하는 두차례의
특별기를 내부적으로 "사하라 챠터"라고 명명했는데, 사상 처음으로 중국
영토를 통과하는 "곤명로선"을 이용했다. 중국과의 항공교류에 새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모든 사업이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국제항공사업에는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
이 많다 보니 어떤 경우든 국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철학이 되기도 한 것이다.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올림픽 서울 유치방침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79년 고 박정희대통령에 의해서였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으로 부상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음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기 위해 81년9월 세계각국의 IOC위원들이
서독의 바덴바덴에 모일 때가지도 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불투명했다. 오히려
일본의 나고야시가 유력한 후보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우리측 올림픽 유치단이 81년여름 바덴바덴을 중심으로 각국의 대표들을
설득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할 당시, 나는 남덕우 전총리를 단장으로 한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스칸디나비아에 출장중이었다. 이때 서울로부터
사절단장을 통해 내게 전보가 한통 날아왔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83차
국제올림픽 조직위원회 총회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측 올림픽 유치대표단과
합류해 달라"는 정부 고위당국자의 전보였다.
전화를 걸어 알아보니 프랑스 IOC위원들이 한국을 지지하게끔 책임지고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스 IOC위원중 한사람은 보멍이라는 귀족 출신의 백작이었고 또 다른
한사람은 전각료이자 세계 최초로 별도 산소공급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했던 프랑스의 영웅 에로조그씨였다. 나는 73년부터 한.불경제협력
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을 맡는등 여러가지 인연이 있어 프랑스의 저명인사들
을 많이 알고 있었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처음으로 구입하게 된 이래 77년
에는 프랑스 일등공훈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모임
에서 웬만한 유명인사들을 대부분 만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일정들로 볼일이 많았었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기꺼이 협조했다.
나는 프랑스로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일본으로 날아갔다. 싸움터에 가려면
적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나고야에서는 올림픽
유치 열의에 못지 않게 반대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서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유인물들을 수집하고 몇가지 준비를 한뒤 파리로 갔다.
프랑스의 IOC위원들을 만나 일본내에서는 나고야 시만들이 올림픽유치를
반대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한국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에로조그 위원은
한국이 아직 개발도상국으로서 올림픽 개최는 부담이 클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그대로 물러설수 없기에 나는 그와 절친한 인사들까지
파악하여 설득에 들어갔다. 결국 세번이나 찾아가는 삼고초려끝에야 우호적
인 대답을 받아낼수 있었다.
바덴바덴에서 우리측 유치대표단과 합류한 나는 아프리카 리비아대표인
아타라불시씨도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측 인사와의 관계에서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지 무척 완강한 태도
를 취했던 그를 내가 설득하기로 했다. 숙소까지 방문하여 "같은 개발
도상국으로서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기회에 결속을 다져야
한다"고 설득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올림픽 서울
개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됨을 역설했다.
이러한 나의 호소에 마침내 아타라불시씨도 수긍을 하는듯 했다. 다음날
총회 석상에서 그는 88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까지
해주었다. 이러한 노력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유치단원들도 대개 비슷한
사정이었다.
결국 81년 9월30일 당초 예상을 뒤엎고 한국이 많은 표차로 일본나고야를
누르고 올림픽 서울 유치를 따냈다. 이어 85년 서울올림픽 공식항공사로
지정된 대한항공은 20년 역사의 항공수송능력을 총결산하는 각오로 올림픽
에 임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성화봉송을 위해서는 관련부서 합동
으로 사전답사까지 실시했다.
선수단 수송을 위해 이익을 초월한 봉사라는 마음가짐으로 몇차례에 걸쳐서
특별기를 운항했다. 아프리카 선수단과 헝가리 선수단을 수송하는 두차례의
특별기를 내부적으로 "사하라 챠터"라고 명명했는데, 사상 처음으로 중국
영토를 통과하는 "곤명로선"을 이용했다. 중국과의 항공교류에 새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모든 사업이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국제항공사업에는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
이 많다 보니 어떤 경우든 국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나름대로의 철학이 되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