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쇼크로 시작된 80년대초의 어려운 경영여건을 극복하며 사업확장을
모색하고 있던 1983년9월.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겪게
되었다.

소련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앵커리지에서 서울로 향하던 007편
항공기가 격추된 것이었다.

강제 착륙 시도조차없이 비무장 민간 여객기에 대한 공격행위가 자행됐다
는 점에서 국제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고 연일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는 전세계에서의 시위와 언론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문명에
대한 반역" "인류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진상규명과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보상등 사건을 수습
해야하는 경영자의 가슴 찢어지는 비애를 어느 누가 상상할수나 있겠는가.
설명 할수 있는 어떤 단어도 없었고 위로를 받을만한 말도 경황도 없었다.

전혀 근거없는 헛소리임이 증명되었지만 스파이 임무설이니 연료절감을
위한 지름길 이용설등과 같은 음해와 온갖 억측이 난무할때는 참을 수
없는 또다른 분노로 치를 떨어야했다.

007기 피격의 진상이 미궁속에 갇힌채 서울올림픽을 눈앞에 둔 87년 겨울
엔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 경유 방콕으로 향하던 858기가 벵골만 부근
에서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테러나 하이재킹을 떠올렸다. 항공기의 상태나 운항 루트
등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단순한 사고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처음 출발지인 바그다드부터 경유지에서 타고 내린 모든 승객들의 명단과
특이점을 알아보라고 본사 대책본부에 일차 지시를 내렸다.

다음날 새벽 정부측 관계자들과 함께 태국으로 떠난 나는 현지 수색활동을
지휘하면서도 계속 보고를 받았다.

서울을 중심으로 태국 버마 바그다드 아부다비 일본등 그야말로 아시아
전체를 연결한 국제적인 조사와 추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점차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이치와 마유미라는 가명을 사용한 두남녀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었다.

지역간의 시차를 무릅쓰고 밤을 지새워가며 연락을 계속하며 각지에서
최선을 다한 회사 임직원들과 우리 정부및 공관 그리고 각국 관계기관들의
공조의 결과였다.

세계 최고의 안전한 항공사로 자부하고 있었던 대한항공은 이러한 비운의
사건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수많은 오해와 왜곡까지 뭉쳐져 곤경에 빠진
적도 여러번이었다.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어 시작하여 반평생을 항공사업에 바쳐온 나에게는
크나 큰 치욕이었고 뼈를 깎는 아픔이었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두번다시 빚어져서는
안되겠다.

뒷날의 이야기지만 마유미라는 가명에서 본명을 되찾은 김현희양이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제목으로 참회의 글을 책으로 출판하여 내게
보내온 일이 있었다.

피해 당사자이기도 한 나는 "분노와 용서"의 갈등속에서 오랜 망설임 끝에
91년 여름 김양에게 답신을 보냈다. 고통을 극복하는 내 심경을 적은 것
이라 요약하여 공개한다.

"현희양이 보내준 책 두권을 색다른 감회를 갖고 읽어보았습니다. 한핏줄
이면서도 둘로 나뉘어 적을 대하듯 살고 있는 우리민족, 김일성우상화로
일관된 공산체제하에서 진실에 눈멀고 그릇된 신념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 형제들입니다.

혁명과업이란 미명하에 아리따운 한 처녀를 수단으로 생명을 짓밟은
비인간적인 잔혹함. 20년이상 갈고 닦은 사상이 한낱 허구며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죄의식과 새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포기할 수 없는 열망사이에서 헤매야 했던 한 젊은이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와 안타까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이 사건에 피해를 당한 대한항공회장으로서 겪은 충격과 놀라움이 개인적
으로는 어느 누구의 것보다 깊은 것이었음은 짐작할수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나는 차츰 이 사건을 개인의 차원을 넘는 분단된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와 상황이라는 배경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사상에의 제물
이 된 한 젊은이의 모습을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런식으로 이용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면서
특별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된 현희양의 앞길을 이제는 격려해 주고
싶습니다(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