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초만해도 국력이 미약해서 해운사업을 조선공업에 연계시킬 수
없었던 시대다.

때문에 조선업체들은 배를 팔려고 외국선주를 찾아 나서야 했던 것이다.
조선 호황기에는 외국배를 만들고 불황일때 우리나라 배를 만들었어야
했으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가상국제세미나"는 계속된다.

<>미국측 발언="왜 개인회사에 이러니 저러니하고 정부가 간섭합니까.
자유경쟁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아니오. 더욱이 대한석유공사는 미국이
50%를 투자한 주식회사 입니다. 국영기업체도 아니지 않소. 왜 정부에서
원유수송계약을 고쳐라 마라하는 것입니까. 석유공사에서 외국회사와
수송계약을 맺든 한국회사와 하든 무슨 상관이오. 더구나 정유공장에서
조선공업을 책임져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이오"

<>세계은행(IBRD)측 발언="과거 30년간 후진국개발 방법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는데 그간 대한민국만이 조선대국으로 부상했습니다. IBRD는
그 이유를 연구중입니다. 후진국들도 한국이 성공한 예를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이렇게 가상하는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최근 (92년하반기) IBRD의 "후진국 개발정책연구팀"에서 온 연구원 두사람
이 나(필자)를 찾아왔다. IBRD에는 이러한 팀이 두개가 있다고 했다. 이들
팀 모두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개척기인 60년대 공업정책에 관하여 알고
싶다며 찾아온 것이다.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산업전략군단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IBRD에서는 한국직원이 이 글을 영문으로 요약해서
관계되는 사람에게 배포하고 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두사람 모두 미국사람이고 책도 많이 저술한 경제전문가이다. 후진국
으로서 "경공업부터 시작하여 중화학공업까지 단시일에 발전한 나라"의
예를 한국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빠른시간내에 성공한 나라로
그 비밀을 알고싶다고도 했다.

<>이희일조선협회상무="일본 조선업계의 경쟁력은 아직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어떤나라도 따라갈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일본의 조선소가
배를 건조할때는 장기저리의 금융사용이 가능한데 그 자금은 일본종합상사
가 알선해 주는 것입니다. 일본종합상사는 조선자금정도는 마음대로 꿔줄수
있는 거대한 기업이고 조선업계와 공동체를 구성해서 수주를 한다는 것
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일본상사는 장기적 하보증까지 해줍니다.

장기적하보증이란 장기간 배를 운항할수 있는 일감,즉 화물을 보증해 주는
제도입니다. 일본상사는 세계 각처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하기 때문에 항상
막대한 물동량(화물)이 있게 마련인데 이 물동량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배를
수주하는 해운업자에게 일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선주로서는 배가 건조된후
일감이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둘째로 일본의 조선기술은 세계 최상급입니다. 국영 선박기술연구소는
전액 국고보조로 연구개발에 힘쓰고 있습니다. 인원이 약3백여명이나
됩니다. 민간조선연구소로는 전국에 7개가 있고 이외에도 어선전문연구소
조선기술센터도 있습니다.

이들 민간연구소에는 연구개발비로 매년 2억달러정도가 보조되고 있어요.
이 보조금은 정부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라 선박진흥회라는 단체가 모터보트
경주대회를 개최,여기서 얻은 수익금중 일부(매출액의 3.3%)를 선박연구
개발비로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독립된 선박연구소조차 없다는 것이 큰 문제거리라고 보여
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선공업은 구라파에 비하면 건실합니다. 구라파
에서는 조선소가 적자를 내기 때문에 국고에서 보조금을 주고 있습니다.
국제경쟁력이 없으니 국가에서 선가의 10%를 보조하고 있습니다"

이상이 가상국제세미나를 통해 본 우리조선공업의 초창기 현상이다. 우리
조선공업이 무에서 시작,국제적인 대형조선소를 건설하고 초대형 유조선을
건조해서 수출하기 시작했다는 단계까지의 이야기였다. 다만 이 시점까지만
해도 배를 건조한다고 하지만 배껍데기(선체)를 만들고 여기에다 선박에
필요한 각종 기계장비(엔진 스크루등)는 모두 수입해다 쓰는 단계였다.

국산화는 73년부터 본격화되는 중화학공업,특히 창원기계공업기지가 완성
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산업전략 군단사를 끝내면서 필자가 이 글을 쓰게된 동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60~70년대에 우리나라 경제발전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자료를 정리하고 싶어서 였다. 주역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분도
있어 더 늦기전에 생존해 계시는 정책담당자 기업가 과학기술자 생산근로자
들의 증언과 간직하고 있는 각종 자료를 정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
됐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후 더욱 더 그 필요성과 귀중함을 알게 됐다.
이런 자료를 남겨놓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이라고도 느껴
진다. 그래야 후세 자손들이 분석하고 평가할수 있지 않겠는가.

이 글속에서 필자가 50년후나 1백년후의 독자를 위해서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로는 독자들과 후손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깨닫게 하자는 뜻
이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최악의 경제상태에서 현재와 같은
공업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없다. 우리 민족이 우수하다는 단적인 증거다.
그것도 불과 20년사이에 기초를 닦았고 그후 10여년만에 이룩한 성과이다.
이러한 민족의 우수성을 연대별로 실례를 들어가며 증명코자 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고,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다. 그것을 슬기롭게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셋째는 경제발전을 해오는 과정을 설명하기위함이었다. 우리나라는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아주 특이한 한국형 개발방식을 취해서
성공하게 됐다. 이러한 한국형 모델은 전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어
여기에 대한 이론적 시도를 하고자 한 것이다. 한국형 모델에 대한
설명이며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사이다.

넷째는 남북대립관계가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60~70년대는 남북간의 긴장이 최악의 상태였다. 이러한 남북
관계의 긴장은 경제건설에 큰 자극제로 작용했다. 우리나라로서는 북한의
경제력(공업)을 앞서기 위해서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짰다. 그리고 국민
모두가 총력을 다했다. 그 한 예가 중화학공업 육성과 방위산업 육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산업전략 군단사"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섯째는 경제나 공업은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것 같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순간에 한단계 높은 차원으로 껑충 뛰면서 발전한다는 사실
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 예로 우리나라의 정밀가공 기술이 10분의1mm
시대에서 1백분의1mm로 향상되는 순간 갑자기 기계공업이 발전하기 시작
했다. 각종 산업기계가 국산화되고 수출되면서,기계공업뿐 아니라 다른
산업까지도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학적 MACRO"입장에서는
소홀히 다루기 쉽다.

여섯째는 공업의 한 분야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여러 공업이 서로 상호작용을 할 뿐아니라 더 나아가서 공업,각 산업분야
심지어는 정치 외교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이미 설명한
대로 조선공업이 시멘트공업,3차산업인 해운업,유류값 인상문제등과 관계가
있고 기계공업이 방위산업,해군의 함정납북사건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느 한 공업만 떼어서 볼수 없고 당시의 나라 상황전체를 보아야
설명이 가능하다.

일곱째는 경제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인력의 질이 급격히 달라진다. 단순
노동 기능공에서 기술공 시대로 이어지고 기술자 과학자의 시대로 변천해
간다. 기술인력 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인력 양성은 정부의 책임
이라는 점을 일깨우고자 했다.

여덟째는 경제를 실제로 담당하는 기업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한국형 재벌은 좀 특이한 점이 있어 그 탄생과정을모르고서는 성격자체를
판단할수 없다.

아홉째는 경제발전에 있어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다. 국가원수는 어떠한
판단을 했고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결단을 내렸으며 공업정책가는 어떻게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했는가. 기업가와 근로자가 얼마나 합심하고 열심히
일했는가. 이러한 분들의 이야기를 필자가 얻을 수 있는 자료의 범위내에서
만이라도 기록에 남겨놓으려 했다. 60~70년대의 경제발전은 정부와 기업가
와 근로자 그리고 국민전체가 "한국주식회사"형태로 합심 단결해서 이루어
놓은 성과라는 점도 강조하고자 했다. "그 당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도
써놓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에게는 성장과정이 있듯이 경제에도 발전과정이 있다.
발전과정을 모르면 현재를 판단할수 없고 앞으로의 방향도 설정할수 없다.
과거를 알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경제의
성장과정을 누군가가 정리해야 되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특히 후세의
자손을 위해서이다.

필자는 60~70년대에 상공부에서 10년,청와대에서 8년 합계 18년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공업정책을 다루는 중심부에서 관여했기 때문에
자료정리작업에 대해 소명감같은 책임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능이 부족한 것을 탓하면서 지금까지 미루어 오다가 기아 김선홍회장의
권유가 있고,한국경제신문사의 요청이 있어 필자로서는 대단한 결심을 하고
이 작업에 도전하기로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