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안양3동 진흥아파트에서 박달동 동사무소쪽으로 내려가면 좁은
찻길옆에 조그마한 가게가 하나 보인다. 탈색된 아크릴간판에 쓰여진
상호는 "수산나슈퍼". 10평이 채못되는 가게다. 안에 들어서면 조금은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공간에 과자 음료수 스낵등이 가득 차려져있다. 평일
저녁이나 일요일 이곳에 들러 라면 몇봉지를 사면 짙은 눈썹에 40대초반의
인상좋은 주인아저씨가 나와 검은 비닐봉지에 라면을 넣어준 뒤 두터운
손으로 동전통을 뒤져 잔돈을 챙겨준다. 주인아저씨는 연신 찾아오는
동네아이들 고객을 맞느라 잠시 쉴틈도 없다. 그럼에도 아저씨의 안색에서는
불평의 빛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이 동네의 이웃가운데서 이 주인아저씨
가 꽤 괜찮은 침대제조업체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대체 단칸방 월세가게의 주인이 중소기업의 사장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황동제 침대프레임및 침대제조업체로 업계에서 가장 잘알려진 크라운금속
의 서기석사장(42)이 바로 이 아저씨다. 낮에는 서사장의 부인 박명숙씨가
가게를 맡고 저녁과 일요일에는 서사장이 가게일을 도와준다. 보통사장들
같으면 정원딸린 주택이나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두다리 뻗고 편히 살수
있을 텐데 서사장은 좁아터진 단칸방에 부부가 함께 기거하며 밤늦게 까지
좁은 가게를 열어둔다. 서사장이 이처럼 몸을 편히두지 않는 서민적 삶을
고집하는 것은 그가 기업을 일으킨 과정과 상당히 관련이 있는 듯하다.
서사장이 중소기업사장이 된 것은 지난 88년 10월. 당시 그는 크라운금속의
영업상무로 근무했는데 소유주인 Y사장이 사채업자의 돈 6천만원을 끌어 쓴
뒤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린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때 사채업자가 영업상무
인 그에게 찾아와 달아난 사장을 찾아내라며 몹씨 행패를 부렸다. 그러나
며칠뒤 그 사채업자는 행패 대신에 서사장에게 뜻하지않은 제안을 했다.
"당신이 크라운금속의 사장을 맡아준다면 사채의 상환을 연기해 주겠소"라고
했다. 그러나 단번에 그는 사채업자의 제의를 거절했다. 빚이 없어도 살려
내기 힘든 회사인데 빚까지 짊어지라는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기 때문.
그동안 영업상무로 열심히 일하는 서사장을 눈여겨봐온 사채업자는 결국
사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까지하게 됐다.

결국 크라운금속의 사장을 맡은 그는 스스로 빚까지 갚으려면 보통사장들
보다는 2배이상 일을 해야한다는 다짐을 했다. 그는 이로부터 3년6개월만에
크라운금속의 빚을 다갚고 92년4월1일 흑자기업의 사장이 된다. 그가 빚을
갚아나간 3년6개월의 기간은 차마 말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시기였다.
서초구 내곡동 헌인가구공단안에 있는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밤을
지새기가 일쑤였다. 그는 회사를 살려내려는 일념 때문에 집에 단한푼의
생활비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생활비를 가져오지 않지만 너무나 열심히 일하는 서사장을 돕기위해 그의
부인이 생각해낸 방안이 동네가게를 여는 것이었다. 서사장은 공장일을
끝내고 고단한 몸으로 돌아와서까지 가게일을 도와주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게는 이들 부부와 두자녀의 생활비를 그런대로 감당할수 있게
됐다. 생활비 걱정을 덜게되자 서사장은 더욱 회사일에 몰두한다. 덕분에
황동관으로 침대프레임을 제작,테라스침대및 뉴코아백화점등 업체에 납품
하는 길을 튼다. 특히 주한미군 교역처를 통해 황동프레임침대를 일본과
하와이등으로 수출하는 기회를 잡는다. 수출기회를 잡은 것은 80년대초반
미8군 교역처와 해외개발공사에 근무하며 익혀놓은 수준높은 영어실력이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서사장은 지난해 황동에 특수래커를 도장,10년이 지나도
변색하지 않는 침대프레임을 개발하면서 국내시장에서도 급속한 신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제 중견기업의 사장이 됐으나 그는 아직도 영업부직원의 손이 바쁠땐
손수 침대를 트럭에 싣고 직접 배달길에 나선다. 더욱이 단칸 가게방살이
를 청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꾸밈없는 가게집아저씨로 살고 싶어한다.

<이치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