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사장이 현직에 오른 것은 지난해 6월이다.
두꺼운 쌍꺼풀에 눈꼬리가 처진 그저 순해보이는 얼굴. TV사회자를 연상
시키는 기시모토사장의 마스크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한 마력을 갖고
있다. 그는 취임후 경영방침을 밝히는 자리에서 "톱다운(Top-down)방식
으로 이끌겠다. 그것도 상호간에 신뢰감이 있는 톱다운이다"고 말했다.
유순해 보이는 신임사장의 얼굴에서 엄격한 상명하달을 강조하는 발언이
나오자 사람들은 놀랐다. 그러나 기시모토사장의 톱다운은 일인 경영체제
와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사원이 의견을 들고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만큼 여유있는 시대가
아니다. 사장 스스로 공장이나 영업소에 들어가 사원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해야한다. 이를 다시 전달한다는 의미의 톱다운이다"
수출비율이 56%에 이르고 있는 올림푸스는 급격한 엔고에 큰 타격을 받고
있는 회사다. 기시모토사장은 현장의 목소리를 빨리 끌어모아 재빠른 경영
판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같은 경영전략을 추진하는데 기시모토사장의 얼굴은 큰몫을 한다.
회장을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에게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부담없이 "기시모토씨"라고 부른다. 자연스럽게 마음에 있는 얘기를 꺼내
놓곤한다.
기시모토사장은 돗도리현의 농가에서 잡화상을 하는 집안의 독자로 태어
났다. 어려서는 당연히 가업을 이어야하기 때문에 감히 시골을 떠난다는
생각을 품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을 진학할 때가 되어서는 저널리스트
가 된다는 포부를 갖고 와세다대학법학부를 선택했다. 직업을 고를때가
되어서는 또다시 방향을 선회했다. 한참 발전하던 정밀공업쪽을 택해
당시까지만해도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올림푸스에 들어갔다.
기시모토의 출발은 동기생들에 비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현미경을
만드는 나가노현공장의 영업부에 배속됐다. 기시모토가 공장생활을 한지
2년째,수출과계장이었던 시모야마현회장이 손님을 모시고 공장견학을 왔다.
그는 스스로 차를 운전해 공장견학은 물론이고 주변공원의 꽃구경을 시켜준
후 고개넘어 기차역까지 정중한 배웅을 해주었다.
시모야마현회장은 20대의 젊은나이에도 마음씀씀이가 훌륭하다고 느꼈던
당시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못하고 있다고 술회한다. 기시모토의 인생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였다.
공장근무 3년째가 돼서 기시모토에게는 국내영업 해외영업의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국내영업을 택했다.
기시모토는 열심히 일했고 일본에서 가장 많은 현미경을 팔아치우는
영업맨타이틀을 따내는 영예도 누렸다.
그러나 기시모토의 국내영업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가노현공장시절
우연한 기회로 좋은 인상을 갖게 된 시모야마가 끌어당긴 것이다. 두사람은
유럽판매법인을 세우기 위해 독일지역으로 부임했다. 기시모토는 어떤 일
이라도 신뢰를 갖고 맡길 수있는 사람이었다.
일본인은 단두명. 한명의 독일인임원과 서너명의 사원이 이끌어가는
외로운 생활속에서 기시모토는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영어실력도
변변치 않았지만"상담은 그나라 언어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독일어를 연마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기시모토는 75년 올림푸스의 유럽법인사장이 돼 다시 독일에 부임하게
된다. 내시경판매에 전념한 결과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을 뛰어넘는
매출실적을 보이는 개가를 올렸다. 84년에는 자신을 총애하는 시모야마가
사장이 되면서 다음사장은 기시모토라는 하마평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미국법인사장 재무담당전무를 역임하면서 제조업체경영자의 필수과목이라
할 수있는 생산 판매 재무의 3개분야를 두루 경험할 수있었다.
기시모토자신은 조직생활에 모든 것을 바치는 맹렬한 회사인간의 인생을
살아온 점에 약간의 반성을 내비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처럼 낡은
타입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성적인 사원들이 힘을 발휘할 수있는 사내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기시모토사장.
갑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지 여전히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잠깐이다.
<박재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