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들어 세계의 항공기 메이커와 항공사들은 항공기의 성능을 개선하고
운항 원가를 낮추고자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항공도 70년대 초반은 명실공히 국제화 달성의 기반을 조성한 시기
였다. 미주와 유럽노선을 개척하는등 국위선양에 앞장서 떳떳하게 대한민국
을 대표할 수 있는 국제항공사로 발돋움했다.

민영화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벗어난 것도 72년이었다. 3년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억원도 채 안되는 적은 금액이지만 처음으로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73년에는 8억원 가까운 흑자를 보았다.

이러한 경영실적을 바탕으로 투자자들에게도 50%의 배당까지 실시했다.
국적항공사 육성에 참여한 보람을 안겨 주고 정부와 국민의 여망에
조금이나마 보답할수 있었다. 액면가의 절반으로도 시세 형성이 안되었던
주가는 당시 액면가의 8배에 가까운 7천7백원까지 치솟았다.

빚더미 항공공사를 인수,3~4년만에 배당까지 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해 9월에는 서소문에 있는 구 석탄공사 사옥을 공개입찰을 통해
매입했다. 현재의 KAL빌딩이 들어서 있는 자리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73년당시 본사 소속 2천5백명의 임직원과 계속 불어나는 인원을 수용
하기위해 사무실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73년10월,그동안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여오던 중동에서 문제가
터졌다. 70년대 들어 세계 석유소비량은 연평균 7%가 넘는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석유 자원으로 고수익 호가보에 눈을 돌린 중동 산유국
들이 이스라엘과의 분쟁으로 정치적 긴장이 높아가자 이를 무기화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석유파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파동의 후유증으로 유가의 폭등은 계속됐다. 전세계 경제를 뿌리째
흔들어 놓을 정도의 심각한 상황을 몰고 왔다. 갤런당 12~13센트였던
항공유 가격이 74년9월에는 45센트까지 치솟았다. 각 항공사들의
연료비부담이 4배가까이 늘었다는 얘기다. 총비용의 10%내외를 차지했던
연료비부담이 계속된 유가인상으로 30%로 육박했다. 무방비 상태의
항공사들로서는 직격탄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일본 같은 선진국들의 경기 후퇴로 인한 항공수요의 격심한 감소도
전세계 항공사로 파급되는 심각한 사태를 빚었다. 미국 최대의 항공사로
군림하던 팬암이나 유나이티드 항공사등은 이 파동의 여파로 74년초 각각
1~2천명씩 대규모 감원까지 단행했다.

주로 미국으로부터 석유를 공급받던 우리나라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쳐
공급 감축의 여파를 목고 왔다.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특히 당시의 경제여건상 국내항공수요보다 제3국에 많이 의존하던
대한항공은,전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여객은 물론 화물수요가 급격히 감소해
회사의 존립이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큰 시련이었다. 항공기 연료의 절대량 확보마저 곤란한 상황이 돼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74년8월15일에는 박대통령을 겨낭한 저격으로
육영수여사가 희생됐다. 안보차원의 악재까지 겹쳐서 수요가 더욱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석유파동은 직접적인 원가 압박을 가져왔으며 그간의 대형기 출현으로
인한 공급과잉 현상과도 겹쳤다. 전세계의 항공업계는 이중삼중의 타격을
받게 돼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이 월남전에서 손을 떼면서부터 군사수송에 투입되었던
항공력이 부정기 항공사등 민간으로 전환돼 기존 항공시장을 크게
잠식했다. 공급과잉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수요 부족에 공급 과잉, 자금 압박과 금리 부담등 한꺼번에 밀어닥친
불황으로 근근이 이루어 놓은 72~73년 이태 동안의 흑자에서 74년에는
다시 80억원의 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모든 항공사들이 다같이
겪는 경영 위기 속에서 대한항공이 이 정도의 적자에 머문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수자는 판단을 위한 하나의 자료에
불과한 것이며,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