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보기의 성공적인 운영에 힘입어 미주노선의 항공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자 나는 유럽쪽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동안에도 에어프랑스사와 접촉을
하면서 파리취항을 추진했으나 73년 내가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면서부터 급진전을 보게 되었다.

유럽지역에는 여러 국가의 맣은 항공사가 운항하고 있는데다 그들끼리의
긴밀한 기업제휴와 자국기이용 경향이 두드러졌다. 때문에 극동의 신생
항공사가 진출하여 새로운 기반을 개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한항공이 이렇게 까다로운 유럽에 단독 취항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유대관계를 돈독히 해온 에어
프랑스사를 동반자로 삼아 우선은 공동운영 방식을 채택키로 상무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런 가운데 나는 정부의 고위 인사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요청을 받게
되었다. 에어버스 항공기 6대를 구매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에어버스는
프랑스를 주축으로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등 유럽에서 이제 막 공동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대한항공으로서는 난처한 요청이었다. 새로 개발된 기종이다 보니 성능
파악도 안되었다. 다른나라 항공사들은 물론 자국의 에어 프랑스조차 아직
주문이 없던 상태였다.

신기종을 운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문인력과 장비등에 수반되는 엄청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에어버스의 성능이나 장단점을 모르기
때문에 선뜻 구매에 동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부가 굳이 에어버스구매를 요청한 것은 외교정책적인 필요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로서는 여러가지로 프랑스와 관계개선이 필요한 사정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가을 유엔산하 세계보건기구(WHO)의 연차총회에서 북한의
단독가입이 유력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북한의
도전을 막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신생국을 비롯한 제3세력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로 이런 나라들에 대한 프랑스
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이런 국가 외교상의 어려운 상황을 안 이상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국익에까지 관계되는 일이라하니 더이상 망설일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기술적인 검토를 해가며 에어버스 구매를 결정
했다.

대한항공의 에어버스 구매 결정은 다른 항공사들에도 구매의욕을 촉진시켜
항공기 메이커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뿐만아니라 한불간 유대
강화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런 후에 대한항공은 73년10월6일 한국민항사상 최초로 서울~파리를 잇는
북극항로에 취항하게 되었다. 미주에 이어 드디어 유럽개척에 성공한
것이다. 이날은 공교롭게 이스라엘-아랍간에 전면전이 발발하여 1차 석유
파동으로 치닫던 날이기도 했다.

미주로선 개설 때와 마찬가지로 화물기 운항으로 1년여의 경험을 쌓은후
여객편을 취항토록 했다. 화물기 운항을 통하여 안전운항과 시장파악등
사전경험을 가져야 승객 서비스를 용의주도하게 잘할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유럽노선 개설은 대한항공으로서 세계일주노선망 구축에 한발자국 다가
섰다는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과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구주의 심장부인 파리를 직접 연결하는 노선 구축을
통해 수출증대및 문화교류등에 일조함으로써 국력신장과 국위선양, 나아가
국민적 자존심을 충족시키는데도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런저런 인연이 쌓이고 73년부터 맡은 한불경협 위원장을 20여년 계속하는
동안 나는 프랑스와의 교류증대에 필요한 갖가지 일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호협력에 기여한 공로가 있다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차례나
훈장을 받기도 했다.

특히 지난 90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외국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이자
국가원수급들에게나 서훈하는 "레종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까지 받는등 큰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