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명예교수 이상수박사(68)는 칠순이 가깝지만 요즈음
젊은이들 못지않은 패기와 열성으로 기초과학연구및 우수 인력양성에 매진
하고 있다.

지난 91년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주일을 반으로 쪼개 서울과 대덕
으로 나뉘어있는 KAIST를 오가며 후진을 지도하고 있고 또 대한광학회장
으로서 오는 8월 국내에서 열릴 제21차 고속촬영 및 광학국제회의준비에
바쁘다.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이박사는 국민학교 교사였던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에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49년)하고 강사로 재직하다 6.25를
맞는다. 휴전이 성립된 1953년 김옥길씨(당시 이대 교무처장 후에 총장 및
문교장관 지냄)의 권유로 물리학과를 만들고 학생을 가르쳤다.

이듬해 문교부가 실시한 영국유학시험에 합격, 런던대(물리학과)로 유학
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귀국하여 59년부터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를 시작, 71년까지 재직하면서 67년부터 4년간 소장을 맡고 차례 국제
원자력기구(IAEA)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한다.

그러다가 KAIST원장을 두차례 맡았다.

-홍릉캠퍼스가 썰렁해 보입니다.

"책과 짐들을 전부 대덕에 내려보내고 이방에는 지금 박사과정학생이 한명
있어요. 마지막 학생으로 생각했는데 또 한학생이 오겠다고 해요.
하겠다고 할때는 교수가 응해줘야해요"

-학생의 연구분야는 어떤 것입니까.

"박사과정 2학년인데 연X선광학분야를 공부하고 있어요. 2백56메가D램을
하려면 연X선광학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학생이 이쪽의 광학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어요. 거울을 이용하는 시스템을 우리가 독특하게 시도하고
있는데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국제적으로도 관심을 받고있습니다"

-박사님께서는 런던대에서 광학을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있는데 원자력
분야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유학가서 배운것은 광학이지만 박사학위한 분야는 박막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원자력하고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어요. 박막분야는 그당시만해도
최첨단분야입니다. 이 지식을 배우고와서 원자력연구소에서 레이저연구를
본격적으로 착수했어요"

-원자력을 위한 레이저광학을 연구한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예를들어 봅시다. 원자로의 로심을 들여다보면 퍼런불이
나는데 물리학에서는 그것을 체렌코프폭사(cherenkov radiation)라 부릅
니다. 이것은 전자가 물속을 광속도보다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전자는 전부 핵연료에서 나오는 겁니다. 퍼런 불을 분석할것 같으면
전자가 어떻게 나왔다는 것을 알수있어요. 이런 것을 연구하는데 레이저
광학지식등이 필요해요"

-국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인 트리거마크 와도 인연이 있는것으로
압니다.

"물론이지요. 과기처장관을 지낸 이관씨등과 원자로건설.운영에 관여
했지요. 하고싶은 말은 지금 원자력연구소에 있는 김동훈박사 이창건박사
또 KAIST에 와있는 이병휘교수같은 분들은 보물같은 사람들입니다. 원자로
안에 들어가서 연구한 경험을 갖고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에요"

-연구소에 10여년간 근무하셨고 소장까지 맡으셔서 원자력에 관한
에피소드도 꽤 있을텐데요.

"많지요. 한번은 영국이 자기들 원자력을 쓰라고 로비를 해요. 호주 사람
들을 만날 기회가 있어 당신들은 영국원전 안쓰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호주는 다른 에너지원이 충분해 원자력이 필요치 않다고 말해요.
나중에 몇번 더 만나 친해지니까 영국의 원자로가 아직은 완전치 않으니
사지말라고 충고하지 않겠어요.

또 이런일도 있었어요. 박정희대통령시절 대덕에다 플루토늄연구시설을
갖추기로 하고 프랑스와 계약을 맺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프랑스가 이 핑계 저핑계대고 이행을 안해요. 나중에는 계약을 취소하자고
해요. 알고보니 프랑스가 미국 눈치를 보는 것이었어요.

얘기가 나왔으니 캐나다 원자로(CANDU)살때 얘기하나 더하죠. 당시 캐나다
측은 우리에게 천연우라늄을 쓰는 원자력발전소를 하나 갖고 있어야 한다고
접근해 와요.

그러면서 자기들 원자로를 사면 덤으로 작은 연구용원자로를 하나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공짜로 연구용 원자로를 주기는 커녕 계약하고
나니까 거꾸로 우리나라 보고 NPT(핵확산금지조약)가입을 서두르라고 미국
측이 야단이에요. 할수없이 대통령이 국회를 열고 조약 비준을 끝냈어요"

-당시 원자력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겠군요.

"그렇지요. 우리가 너무 몰라서 아마 당한것도 있을 겁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세우면서 폐기물처분에 대한 장기대비를 함께 못한것도
무지나 준비부족의 하나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 문제가 원자력계의 주요 현안이 됐어요. 그러나
방사성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하는 방법이 다 나와있어요. 땅속에 묻는
것이 제일 좋아요. 한 1천m쯤 땅속으로 들어가면 돼요. 우리나라 토목
기술로 땅속을 파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안면도사태가 났을때 두가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로 정부가
미국이나 일본같이 큰지역을 잡아서 재처리공장지대같은 것을 갖추려는
꿈을 가졌던것 같아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돼요. 지역을 어느정도 잡아
가지고 꼭 필요한 것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국민계몽을 더 했어야 해요. 현재 발전소마다 갖고있는 임시
저장고를 확장하고 국민계몽을 하는 겁니다"

-"북한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언론에 전해지는 것 이상으로 아는것은 없어요. 그러나 나는 신빙성이
크다고 봐요. 북한은 지난 65년께부터 원자력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조직을 보면 가능성이 큽니다.

북한은 동경대물리학과를 나온후 월북한 도상록과 경도대 출신으로 서울
공대학장을 하다 북으로 간 이승기 두사람을 원자력 소장.부소장에 앉히고
연구를 시켰어요. 연구비 걱정이 없다고 가정하고 30년가까이 일을
시킨다면 우린들 못하겠어요. 그러나 기폭장치 개발에 폭약이 워낙 많이
필요하고 또 엔지니어링이 어려워 이 부분에는 의문이 가요"

-방향을 바꿔 초대 과학기술원장시절의 일들을 말씀해 주시지요.

"지난71년입니다. 하루는 과기처에서 들어오라고 불러요. 갔더니 김기형
장관(초대)이 한국과학원(KAIS)원장자리를 맡으라고 해요. 내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그 대학에 강사를 했을 정도로 학생가르치는 것을 좋아해
원장자리를 승낙했어요. 그래놓고 홍릉에 학교부지를 닦는 일을 하기 시작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박대통령이 공병단을 동원해 공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와요. 민간건설업자들의 공사속도가 늦다고 본 것입니다.

이때 나는 "각하,그러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어요. 대학은 예나 지금이나
순수해야 해요. 군인들이 들어와 공사하다 만의 하나 학생들과 마찰이라도
생기면 대학의 순결성이 사라져 버릴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다행히 제 얘기
를 들어주시더군요"

-초대원장을 하시고 89년에 다시 원장을 맡으셨죠.

"이상희장관(과기처)시절입니다. 이때 원장을 다시 맡기는 했으나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KAIST가 구분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KAIST가 KIST를 품에 안고있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국보위가 KIST가 자금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를 들어 그렇게 해놓은 것
입니다.

그래서 이원적으로 운영됐는데 이를 내가 원상 복귀시켰습니다"

-KIST의 자존심을 회복시키셨군요. 이때 홍릉의 KAIST가 대덕으로의 이전
문제를 놓고 홍역을 치른것 같던데요.

"원장으로서 사실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홍릉캠퍼스에서는 신.증축이
어려워 시설확충에 한계가 왔습니다. 교수들을 모두 모아놓고 대덕으로
캠퍼스를 옮겨야겠다고 여러차례 얘기했어요. 교수들간에 찬반이 엇갈려
시골대학된다고 말이 많아요.

그러다가 나중에 대덕행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대덕으로는 우리가 내려
가는데 왜 그런지 과기처가 좋아하면서 대환영이에요. 이때 과기대도 흡수
했습니다"

-이박사께서는 오랜 연구소 생활끝에 교육기관인 KAIST로 자리를 옮기
셨는데 근래에는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소보다 대학을 더 선호하는것
같습니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래요. 출연연구소가 일은 안하고 월급만 축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가 않아요. 10여개있는 과학기술분야
출연연구소가 큰 국가과제 1~2개씩만 하면 됩니다. 이래라 저래라하고
이것저것 잡다하게 시키면서 간섭하면 연구자들이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과학자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자기일에 몰두할수 있어야 합니다. 연구란 몰두하지 않고는 불가능해요.
에디슨도 물두했을때 많은 발명을 했고 광산에 손댄후 파산했습니다. 뉴턴
도 조폐공사 사장을 하고부터 전혀 연구결과가 없었습니다. 젊어서 연구를
마음껏하고 실력쌓고 나중에 대학이 모시러올때 가도 늦지않습니다"

<대담=강영현 과학기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