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당시에도 조선소에 발주되는 선박의 크기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
유조선은 20만~30만DWT이상의 탱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비해 국내의 대한조선공사등 조선소의 시설은 국제경쟁력이 전혀 없는
소규모의 재래식이었다.

공정방식에서 보면 국제급 조선소에서는 대조립식 연속공정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반면 당시 국내조선소는 소조립식을 채택하고 있었다.즉 국제급 조선소
에서는 공장내에서 대형 블록으로 선체부분을 완성하고 여기에다 기계등
의장품을 미리 장착하는 소위 선행의장을 취한다음 도크에서는 탑재만을 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반해 국내 조선소에서는 크레인이 소형이기
때문에 이용량에 맞는 소형선체 블록으로 밖에 만들수 없었다. 자연히 도크
내에서 하는 작업이 많아지면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국내 조선소는 선체
탑재일이 오래걸리고 기계류 취부공사나 배관 전선포설 공사와 같은 의장
공사도 전부 도크에서 이루어지는 후진적 방식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공장내에서 대형뭉치로 선박부품을 만들때는 각종기계와 자동화 기계를
마음대로 쓸수있으며 운반도 능률적으로 된다. 될수록 많은 작업을 건물
내에서 하고 도크에서는 탑재만 하면 일하는 시간을 대폭 줄일수 있게돼
한 도크에서 생산되는 배의 척수가 늘어나게 된다. 도크를 연속가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조선소의 시설배치면에서는 국내 조선소가 필요할때마다 점진적으로
시설확장을 해 결과적으로 불합리한 배치가 됐고 국제급 조선소에서는
생산설계기법을 도입,미숙련공의 오류를 줄이고 있었다. 또한 신공법을
개발하고 많은 생산관리자료를 축적함으로써 컴퓨터를 이용한 공정관리를
했다. 조선소의 대지면적도 국내조선소는 5만평정도로 국제급 수준인 최소
20만평에 비해 턱없이 작아 생산성은 선진조선소 대비 5배내지 10배의
공수가 더 많이 필요했다. 자재조달도 제대로 안되고 시행착오 때마다
공사를 다시 하게돼 수많은 종업원들이 대기하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기
일쑤였다. 결국 협소한 부지와 짧은 의장안벽,그리고 전반적으로 불합리한
시설배치를 갖고는 국제경쟁을 할수없다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는데 이때
기존의 구식 조선소를 뜯어 고치는 것보다는 새로운 국제단위의 최신식
조선소를 건설하는 쪽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대형조선소 건설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상공부는
74년까지 25만~30만t급의 조선소건설을 완료,74년에는 25만t급 배를
한척이라도 수출하자는 안을 수립했다.

75년에는 25만t급 2척,76년에는 3척정도까지 수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정도의 물량갖고는 새로운 조선소를 운영하기 어려울 것이어서 조선소
자체가 수주활동을 펴는 한편 정부에서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조선사업 3차5개년계획을 보면 선박수입은 74년부터 금지시키는 반면
수출선에 대한 자금지원은 대폭 증액키로 했다. 71년에 24억원에 불과하던
것을 74년에는 2백11억원,75년 3백억원,76년 4백80억원으로 늘려 지원키로
했다.

국내선박에 대한 건조자금지원도 71년의 95억원에서 72년 2백8억원,73년
2백27억원등으로 대폭 증액했다. 국내선과 수출선을 합쳐 72년부터 76년
까지 5개년 계획중 2천5백억원을 지원하겠다는 의욕적 계획을 세웠다.
정부에서 적극 지원해 줄테니 기업가는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현대의 정주영 회장은 나(필자)에게 "현대는 전사적으로
조선소건설에 총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영국으로 가서 차관교섭을
벌이겠다"면서 "상공부에서도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상공부의
안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잘 알고있다"며 "이의가 없다"고 했다.
조선소란 항시 불황과 호황이 서로 교차되는데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한다는
말도 나누었다.

정회장은 "현재 세계 조선업계는 호황의 절정기인데 앞으로 침체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멀지않아 초대형유조선(VLCC)이 대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또다시 올것이다. 그때는 전세계의 기존 조선능력 갖고는 감당할수
없으니 조선소를 지으려면 지금이 그 시점"이라고 했다.

"더욱이 조선소는 자동차공업과 꼭 같다. 수출을 하려면 한국사람이
독자적으로 회사를 운영해야지 합작투자 형태로서는 지장이 많다"고도
했다. 이점에 대해서는 상공부 의견과도 합치됐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배의 판매에 대해서 걱정했는데 정회장은 자신이 있는듯했다. "배가
좋고 값이 싸면 안팔릴리가 있겠소. 현대는 세계에서 제일 싸게 배를 만들수
있다"라고 해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걸프선 수주에 관한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현재
걸프와 원유수송계약 수정교섭을 진행중인데 앞으로 한국에서 유조선을
생산할때에 대비해서 한국에서 건조한 배로 수송할수 있도록 조항을
고치겠다"는 계획을 알려주고 그렇게되면 "최소한 대형유조선 몇척의
일감은 있게 될것"이라고 했다.

정회장은 곧바로 영국으로 차관교섭차 떠났다. 나는 이때부터 어떻게
하면 대형유조선에 대한 작업량을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끝에 걸프로부터 2만~3만t 유조선을 수주받은 경험을 토대로 그길을 정유
회사에서 찾기로 했다. 나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걸프와의 운송계약수정을
교섭하고 있을때였다.

걸프운송계약 수정문제로 한동안 밀고 당기기도 했으나 이문제가
불가항력적인 중동전쟁여파로 생겨난 일이어서 결국은 서로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운송계약을 수정해주는 대신 요구조건을 내놓기로 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을 발전시키는 소지를 이번기회에 확실하게
만들어 두자는 생각이었다. 20만t급이상의 유조선을 국내에서 건조해
팔아먹을 궁리를 했다.

쿠크씨와 71년9월초까지 실랑이를 벌인끝에 "한국국적유조선이 확보되고
그 운임이 현계약단가보다 저렴할 경우에는 석유공사 소유 원유의 전량
까지도 한국 국적선에 의하여 수송하는 권한을 갖는다"라는 조항을 운송
계약수정시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가 유조선을 갖게되면 한국
선박으로 수송할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해 9월15일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 조항으로 우리나라 해운업계는 막대한
화물량을 확보하게되고 이에따라 유조선확보가 시급해져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할 물량이 늘게 되어 이를 위해 걸프의 원유를 수송할 20만~30만t급
조선소가 필요하게 됐다. 다시말하면 국내에 20만~30만t짜리 조선소를 건설,
대형유조선을 만들어 석유공사의 기름을 나를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래서 대형 유조선을 건조할수 있는 대단위 조선소 건설사업이 꿈이 아닌
현실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또 걸프와의 운송계약수정때 그들이 우리 유조선을 쓰는것을 이리저리
이유를 대며 거부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해 "한국쪽에서 6개월전에
한국유조선을 쓰겠다고 통고하면 걸프쪽 손해는 없다고 본다"라는 조항을
삽입해 놓았다. 6개월전에 통고하면 걸프측이 법적으로 반대할 근거가
없도록 못박은 것이다. 당시는 단지 미래에 대비한 조항으로 생각했는데
이조항이 후에 현실적으로 너무나 유효하게 활용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세계 조선업계가 불황일때 현대조선소에서 건조한 유조선 3척을 활용할수
있게돼 불황의 큰 고비를 넘길수 있게된다(후에 다시 설명한다).

나(필자)는 이 계약수정교섭을 끝내고 2개월후(71년11월) 청와대로 발령나
더이상 조선공업에 관여할수 없게된 관계로 여기서 정회장 일행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차관을 얻기위해 노력했던 내용을 현대중공업사를 참고해
살펴본다.

현대는 일본과의 합작교섭이 결렬된 뒤 유럽쪽에서 차관을 도입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71년3월 런던지점을 발족,외국은행및 관계회사들과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갔다. 필요한 외자는 4천3백만달러였다. 그 금액은 당시로서는
너무 큰것이어서 한나라로부터,그것도 후진국의 일개 기업이 민간베이스로
기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선 차관도입선을 다변화하기로 했다. 영국의 버클레이은행을
간사은행으로해 프랑스의 엥도수에즈은행,스페인의 코페이사,서독의
프란츠키르히 펠트사를 끌어들여 컨소시엄을 형성키로 했다.

각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사업계획서는 검토하지도 않고 한국과
현대건설의 조선능력과 기술수준을 문제삼았다. 더욱이 프랑스는 유럽을
순방중이던 일본 대장성 관리가 파리를 다녀간 뒤부터 아주 냉담해졌다.
"아카사카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대형조선소 건설능력이 없다고 밝힌
일본이 유럽지역에서 방해공작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었다.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목선이나 만들라"며 경멸했다.

또 각국 정부는 주한대사관으로 하여금 국내 조선업계와 은행을 통해
현대에 대한 조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현대건설이 국제경쟁력을 갖춘
조선소를 건설할수 있는가. 또 배를 만든다해도 세계 각국의 선주들이
그 배를 믿고 사갈수 있을 것인가등을 조사시켰다. 각국 대사관의 참사관
상무관들은 국내조선업계와 은행등을 상대로 현대건설의 재정및 기술능력,
시장성등에 관해 조사활동을 벌였다. 결국 "현대건설은 건설업체니까
조선소는 만들수 있을지 모르지만 배는 못만든다. 설사 배를 만든다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경쟁할수 있는 대형선박은 만들지 못한다. 배를
만들어 놓아도 믿고 살 선주는 없을 것이다"라는 부정적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차관컨소시엄 구성계획은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