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유정만큼 2년이라는 짧은 작품
활동기간중에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도 드물것이다. 무려 30여편의 단편을
남겨 놓았으니 말이다. 그것도 페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막바지 삶속에서 쓴 것들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문학적 열정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그런데 그가 작품들을 양산해 낸 담면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폐병치료약
을 살 돈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는 돈이 생기면 이상 김문집등
문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셔버림으로써 생명을 단축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남긴 작품들이 졸속한 것들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한국적 채취와 서정이 넘쳐 흐른다. 그것은 춘천가까운 경춘가도에 세워져
있는 "김유정 문인비"에 새겨진 그의 작품 "산골 나그네"의 한 구절에서도
베어 나온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만에서 들리는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건
물소리, 골을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 퐁!''"

1930년대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토속적인 어휘의 풍부한
구사, 위태하고 정확한 문체와 문장의 구성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가난
하고 학식도 없는 소박한 농촌의 일꾼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도 무언가
미소를 머금게 하는 해학이 있다. 또 그 해학속에는 한국인의 특유한 슬픔
이 깃들어 있다.

김유정문학의 무대는 강원도춘성군신동면에 있는 실제마을이다. 1908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나 일찌기 부모를 여읜 그는 재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을 중퇴한뒤 28년 부모의 고향인 실제로 내려
간다. 그는 그곳에서 브나로드운동을 펼치면서 작가로서의 싹을 기른다.
33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2년뒤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신춘문예에
응모해 "소낙비"와 "노다지"로 문단에 나온다.

그런데 그의 문학작품이 30년대 작가들 대부분의 경우처럼 "역사성의
부재"라는 순수문학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일제 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한채 평화로운
피리소리만으로 충만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타계한 3월을 맞아 정부가 그를 이달의 인물로 선정해 서울과 춘천
춘성등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벌이는 것을 계기로 그의 혜성같은 문학혼이
우리를 감싸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